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기록 유산 중 우리의 유산은 총 13건이다. 그리고 그중 8건이 모두 조선의 기록. 조선은 단연 뛰어난 기록의 강국이었다.
그리고 약 100여년이 지난 오늘, 기록의 강국이라는 영광은 사라졌다. 우리는 기록문화의 위기에 서있다. 조선으로 치면 ‘사초’에 해당하는 ‘대통령 기록물’이 온갖 수난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10여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대통령기록물은 정치권에서 숱하게 논쟁의 대상이 됐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대통령 기록물은 국가기관이 생산한 공공기록물이자 한 나라의 역사를 증명하는 중요한 기록이다. 따라서 전 세계의 국가들이 기록관리기관이나 문화유산기관을 통해 대통령 기록물을 관리·보존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2007년 <대통령 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이하 대통령 기록물법)> 제정을 통해 기록물 관리의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하지만 우리의 대통령 기록물 관리·보존 체계는 아직 걸음마 단계다. 김영삼 정부 때까지만 해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되는 정부 기록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대통령 기록물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기록물은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2008년 e지원시스템 ‘유출’ 논란, 그리고 2013년 남북정상회담회의록을 둘러싼 논란은 정치권의 갈등을 격화시켰다. 얼마 전에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대통령 기록물의 내용이 포함됐다는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기록 유출’?
첫 번째 논란부터 살펴보자. 많은 국민들은 여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통령 기록을 유출했다가 문제가 되자 반환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유출’ 사건으로 볼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에 있던 기록물은 ‘진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퇴임 이전에 그들은 대통령 기록물의 진본을 국가기록원으로 이관했다. 사저에 있던 e지원시스템(대통령 업무 시스템)은 ‘사본’으로, 기록물로서의 증명 효력이 없다. 심지어 전임 대통령의 기록물 접근·열람 권한은 <대통령 기록물법>에서도 보장하고 있는 권한이다. 결국 기록물의 ‘유출’이 아닌 것이다.
결국 이 사건의 본질은 ‘대통령 재임 중에 만든 전자적 형태의 기록물 사본을 퇴임 후에도 보관할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질문에서 현행 <대통령 기록물법>의 한계가 드러난다. ‘사본의 보관’에 대한 것이다. 현행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과 <대통령 기록물법>에는 ‘사본’ 기록물이 대통령기록물에 해당하는지에 관한 규정이 없다. 자연스럽게 사본 기록의 보관 및 폐기에 관한 규정도 없다. 결국 노무현 대통령의 기록물 사본 보관은 불법도 아니지만 합법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그야말로 무법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대통령 기록물법>이 보장하고 있는 전임 대통령의 재임 당시 기록물 열람권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사저에 e지원시스템을 설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남에 있는 대통령기록관에 방문해야만 기록물 열람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름만 ‘지정기록물’
법률이 보장하고 있는 권리가 지켜지지 않는 경우는 또 있다. 대통령 지정기록물 제도다. <대통령 기록물법> 제17조에는 △국가안전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는 기록물 △대통령의 정치적 견해나 입장을 표현한 기록물 등 6가지 유형에 해당하는 대통령 기록물을 일정 기간 비공개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즉, 대통령이 기록물 중 일부를 ‘대통령 지정기록물’로 지정하면, 최대 15년까지 해당 기록물의 열람과 사본 제작이 금지되는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과 관련된 기록은 최대 30년까지도 비공개 할 수 있다.
왜 이런 제도가 있는 것일까?대통령 기록물 중에는 민감하고 정치적인 기록물이 많다. 정치적 경쟁자들이 이런 기록물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대통령이 재임 당시 기록물을 남겨두고 싶어 할까?애초에 문제가 될법한 기록물을 생성하지 않거나 폐기해버리는 것이 더 편한 것이다. 결국 대통령 지정기록물 제도는 대통령 기록물의 생산을 보장하고, 그렇게 생산된 중요 기록물을 영구적으로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진 장치다.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법률과는 달랐다. 해당 법률이 시행된 지 8년. 그 사이 대통령 지정기록물은 세 번이나 세상에 공개됐다. 2008년에는 <쌀 직불금 관련 지정기록 열람에 관한 건>이 국회에서 의결되면서 대통령 지정기록물이 공개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기록 유출 조사를 위해 영장이 발부되면서 검찰 또한 기록물에 접근했다. 그리고 2013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논란에서도 국회 의결로 회의록 진본 접근이 허용됐다. 법률은 명목상 존재할 뿐, 지정기록물이 제대로 보호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정한 보존 기간 동안 봉인돼야 할 지정기록물이 공개된 것은 조선시대로 치면 실록을 공개한 것과 같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정기록물을 열람했을까?
최근에는 지정기록물 유출 의혹까지 불거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둘러싼 논란에서 전임 대통령 열람권 보장의 미흡함이 드러나자, 2010년 <대통령 기록물법>이 개정된다. 전직 대통령의 ‘온라인 열람’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한 것이다. 하지만 또 하나의 문제가 발생한다. 지난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발표한 회고록 <대통령의 시간>에 대통령 지정기록물의 내용이 포함됐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2013년 2월,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저에 대통령 기록물 온라인 열람을 위한 장비를 설치했다. 법으로 보장된 열람권의 행사다. 문제는 ‘지정기록물’에 접근했느냐 것이다. 법안이 보장하고 있는 열람의 범위에 지정기록물과 비밀기록은 해당하지 않는다.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회고록 집필 과정에서) 대통령이 위임한 사람이 대통령기록관에 가서 대통령 기록물을 수차례 열람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히면서 논란은 더욱 커졌다. 사저에서 온라인 열람이 불가능한 기록은 비밀기록과 지정기록물 뿐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통령 지정기록물을 열람한 사람이 누구인지 공개하라는 요구가 거세졌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행정관이었던 대통령기록관 이재준 관장이 기록물 열람 내역 공개를 거부했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국가기록원 측에 ‘대통령 지정기록물 열람 일지’를 요청했지만 기록원은 “장관에게 보고해야 할 사안”이라며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대통령 지정기록물의 내용은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이명박 전 대통령의 회고록에 지정기록물의 내용이 포함됐는지, 누가 지정기록물을 열람했는지 역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국가기록원의 중립성이 훼손됐다
대통령 기록물을 관리하는 기관의 중립성과 독립성도 훼손된 상황이다. 현재 국가기록원은 행정자치부 산하 기관, 대통령기록관은 국가기록원 소속으로 행정자치부의 2차 소속기관이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부 취임과 동시에 이뤄진 정부조직 개편에 국가기록원이 행정안전부(현 행정자치부) 소속으로 변경됐기 때문이다.
국가기록원의 수장인 국가기록원장 역시 고위 행정관료 중에서 임명되고 있다. 역대 국가기록원장 10명 모두가 행정관료 출신이며, 심지어 현 박동훈 기록원장은 전 대통령비서실 비서관 출신이다.관료 및 조직의 독립성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이므로 국가기록원은 정권의 입김에 흔들릴 수밖에 없다. 사실상 국가기록원장에게 ‘독립된 결정권’이 없는 구조다.
실제로 지난 2008년, 국가기록원은 이명박 정부가 지적한 사안에 따라 노무현 전 대통령을 고발하기도 했다. 국가기록의 관리자로서 지켜야할 중립성이 훼손된 것이다. 기록물에 관한 이해도가 낮은 정부와 언론이 ‘원본 유출’, ‘기록물의 사유화’ 등 잘못된 용어를 사용하는 동안에도 이렇다 할 해명을 하지 않았다.

객관적인 기록을 기다리며
계속된 논란에 기록관리학계는 지속해서 우려를 표하고 있다. △<대통령 기록물법> 보완 △국가기록원의 중립성 회복 및 독립 등의 목소리가 나오는 것이다. 한국기록관리학회 등 기록학계는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공개가 논의되던 지난 2013년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기록물을 이용한 정쟁의 중단과 국가기록관리의 혁신을 요구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은 더디게 움직이고 있다. 현재 19대 국회에는 <대통령 기록물법> 개정안이 총 9개 발의돼 있다. 하지만 모두 소관위원회에서 심사가 계류되고 있는 상태다. 대통령 기록물을 둘러싼 정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 속에서 대통령 기록물이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관리·보존될 리가 만무하다. 대통령 기록물의 온전한 보존을 위해서라도 법률 개정안이 하루빨리 국회에서 재논의 돼야 할 것이다.

   
 <대통령 기록물법 개정안 국회 계류 현황>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