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밀양역에서였다. 꽤 길게 늘어선 줄 한가운데서 나는 매표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총총 흐르는데 좀체 줄어들 줄 모르는 대열에서 짜증이 날 무렵, 성미 급한 어르신 한분이 창구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묵묵히 기다리던 다른 사람들도 창구를 향해 따가운 눈초리를 던지고 있었다. 창구 앞에선 역무원과 삼십대 중반의 여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차편이 여의치 않은지 다른 차편과 운임을 물으며 이따금씩 고개를 돌려 양해의 눈빛을 던졌다. 역무원은 진전 없는 지루한 응대에 진땀을 흘리고 있었고, 여성 뒤엔 열 살 남짓한 소녀가 새까만 눈망울을 굴리며 껌딱지처럼 붙어 있었다.

모녀지간이 분명한 것 같은 딸은 엄마의 다급한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연신 해맑은 얼굴로 역사를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대거나 기다리는 이들에게 싱싱한 웃음을 날려댔다. 역무원과 실랑이하랴, 사람들 눈치 보랴 정신없는 엄마와 달리 세상구경, 사람구경에 푹 빠진 것 같았다. 마치 나비가 날아다니듯 소녀의 눈동자는 춤추듯 움직였고 이따금씩 한 곳을 응시한 채 상큼한 눈웃음을 짓기도 했다. 그러던 중 소녀의 눈이 나와 마주쳤고 나는 반사적으로 활짝 웃어주었다. 그때였다. 나를 향해 손을 번쩍 치켜든 소녀의 손과 나란히 솟구친 또 하나의 손! 갑작스러운 소녀의 만세에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여성의 손이 황망하게 허공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목은 붉은색의 단단한 끈으로 묶여 있었다.
장애 때문에 어디로 튈지 모를 딸의 손목을 붉은 끈으로 결박한 엄마는 얼마나 절박했을까?나는 긴 줄 한가운데서 길 잃은 아이처럼, 그 아이를 찾아 헤매는 엄마처럼 속절없이 마음이 저려왔다. 순간 다자이오사무의 <만년>에서 읽은 붉은 실이 떠올랐다. ‘우리 오른쪽 새끼발가락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붉은 실이 묶여 있다. 그 끝은 반드시 누군가의 발가락에 묶여 있어서 두 사람은 아무리 떨어져 있어도 끊어지지 않고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엉키지 않는다’는 지극히 운명적인 결박의 붉은 실. 모녀의 붉은 끈은 수갑처럼 무겁고 운명처럼 끈끈해 보였고, 붉은 끈에 묶인 모녀의 손은 내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하고 아픈 손이다.
나는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손을 쳐다보는 습성이 있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보이는 것 같아서 때론 손을 통해 사람을 재단하기도 한다. 굳이 손에 대한 취향을 밝히자면, 깔끔하게 다듬어진 하얀 손, 손가락이 가늘고 긴 예쁜 손, 네일아트로 멋을 낸 손에는 감흥이 없다. 거칠고 투박한 손, 손마디가 툭툭 불거진 손, 거무튀튀하게 그을린 손, 삭정이처럼 뼈가 앙상한 손, 손톱 한쪽이 달아난 손, 번데기처럼 주름진 손, 짧고 뭉툭한 손에 이상하게 마음이 간다. 그렇게 굴곡진 손들 앞에선 내 손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 슬그머니 양손을 내밀어 위로해 주고 싶기도 하다. 고단한 삶의 한가운데서 방황하는 손에는 응원의 하이파이브를 쳐주고 싶고, 열정을 다해 고군분투하는 손에는 손뼉을 쳐주고 싶고, 아픈 눈물을 닦는 손에는 살포시 내 손을 포개어 주고 싶고, 뜨거운 땀을 훔치는 손에는 격한 악수를 청하고 싶다. 그리고 희망한다. 못생긴 내 손이 어디에 내밀어도 부끄럽지 않은 떳떳한 손이기를.
 

박미정(신문방송학 석사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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