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0여 년 전 중국 명청 교체기, 명이 왜 망해 가는가를 곰곰 생각하던 학자 고염무는 ‘천하(天下)를 보전하는 일에는 필부(匹夫)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정리한다. 그는 망국(亡國)과 망천하(亡天下)를 구별한다. 나라의 주인이 바뀌고, 연호가 바뀌는 것이 망국이다. 올바름과 의로움이 무너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망천하이다.
오늘날 우리 상황에 잇대어 보면, 망국은 일종의 정권 교체라고 할 수 있겠다. 문민정부, 참여정부 등이 전통사회의 연호에 버금하는 것이겠다. 민주주의 체제에서 정권 교체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다. 천하를 ‘세상’ 쯤으로 본다면 망천하란 말세를 말함일 것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라고 했던가. 정권이 바뀌어도 산천과 사람은 그대로다. 봄꽃이 피고 가을 단풍이 물들 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 나아지거나 고통스러워지는 일이 있을 뿐이다.
근래 세상살이를 보면 ‘망천하’라는 단어가 절절히 다가온다. 배 두드리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자들도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삶은 호전되기보다는 악화되고 있다. 그렇다고 설마 말 그대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기야 했겠냐고?왜 아니겠는가. 세상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지 않는가. 앞뒤 가리지 않는 경쟁, 약육강식이 이 사회 운영 원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이다. 그리하여 삶의 벼랑으로 내몰린 생계형 자살자가 1년에 수 천 명이다. 성적, 입시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해 중고등학생들이 자살하는 것이 일상 풍경인 나라가 이 나라 말고 지구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이것이 개인의 의지, 능력 문제로 치부될 일이겠는가. 사회적 살인이다.
대학도 경쟁, 약육강식의 제로섬 게임에 내몰려 제 모습을 잃어 가고 있다. 교육의 공적 기능은 내팽개쳐지고, 사익 논리가 거대한 탁류로 흐른다. 대학을 그 탁류에 밀어 넣고 국민 세금으로 장난질하는 자들이 교육 정책 결정의 꼭대기에 앉아 있다. 국립대 법인화, 총장직선제 폐지 강압 등은 모두 이 탁류 안의 한 흐름일 뿐이다. 
왜 이 지경일까. 고염무는 나라를 보전하는 일은 임금, 신하, 기름진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육식자(肉食者)가 도모하는 일이지만, 천하를 보전하는 일은 필부와 같은 천한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갈파한다. 살만한 세상은 거저 얻어지지 않으며, 그 구성원들의 의지와 노력 여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 것이다. 경쟁 대신 배려와 공존, 약육강식 대신 나눔이 넘치는 사회는 보통 사람들의 관심, 참여가 모여 도도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이다. 설령 올바른 생각을 가진 위정자라도 자기 뜻대로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21세기 문턱에서 이미 그것을 목격한 바 있다.
대한민국은 서울 공화국, 새누리 공화국, 삼성 공화국이 아니다. 필부 하나하나의 판단, 결정, 참여가 나라꼴을 만들어가는 민주공화국이다.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리라. 묵인, 방조, 무관심, 무기력, 우울, 회의주의의 사슬을 끊는 것이 먼저 할 일이다. 그리하여 더불어 살아가게 될 미래에 대한 희망과 상상력, 맥없는 비난이 아닌 치열한 비판의식,  관심·참여·연대의 어깨동무가 필요할 때이다. 1910년 8월 매천 황현이, 2015년 8월 우리 동료가 ‘배워서 남 주어야 할’ 식자들에게 목숨으로 내리치는 죽비 소리이다.       

   
양정현(역사교육)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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