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학생들이 일 년 내내 사설 학원을 기웃거린다. 일부 지방학생들은 서울의 학원 촌으로 유학을 가기도 한다. 학원비 역시 버겁지만, 학원을 다녀야 남보다 뒤쳐지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안정된 직장확보를 볼모로 모든 것을 희생하는 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이다.

  취업하고 싶은 희망직종조차 없을 수 있는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게, 더 많이’ 준비하라는 것은 난감한 일이다. 희망직종이 없기 때문에 직종 불문하고 이력서를 쓸 수 있을만한 화려한 스펙을 만들어야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업에 취직할 생각이 없고, 자신의 길을 개척하려는 학생들에게 현실은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일자리가 곧 복지’인 나라에서 ‘취업’ 외의 길을 찾는 학생들이 매달릴 곳도, 문의할 곳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매달리는 스펙 쌓기에 무심하기에는 불안감이 너무 클 것이다. 더군다나 대기업이나 공기업 등에 취업하는 데 도움을 주는 곳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혼자뿐인 심정으로 나날이 패배감에 빠져들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어가는 생활환경은 어떠하겠는가. ‘삼포세대’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그 말이 청년들의 의식을 잠식하지 않던가. 차라리 ‘연명’이라는 말이 무색할 것이다.
  사회적 책임감이나 이웃들과의 연대를 가볍게 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에 있었던 故 고현철 교수의 영결식과 분향소에서 학내의 무거운 분위기는 더욱 두드러졌다. 안타까움과 놀라움도 잠시, 분향소와 영결식에 발걸음을 한 학생들의 숫자는 2만 효원인에 비해 그리 많지 않았다. 혹자는 학생들의 반응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을 경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누구인가? 대학 수업에서조차 학생들 간의 소모적인 경쟁과 서열을 매기는 상대평가가 대세이고, 취업시장에 나가서도 기업들은 구직자들의 인성보다는 외형적인 요소와 수치화된 자료들을 더 선호한다. 지금의 학생들이 선의의 경쟁을 넘어 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 무방비로 빠져드는 이유이다. 상황이 이를진데 누가 생존을 위한 스펙 쌓기에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청년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급료와 3개월 단위의 불공정한 노동계약서에 갇히는 한, 고시원에서 버티며 사는 것조차 버거울 것이다. 해외취업이 청년실업의 돌파구라든가 기성세대의 월급을 깎아 청년고용을 창출한다는 등, 실효성이 없는 대책이나 부모세대와 세대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정치는 지양해야 한다. 늘 말로만 청년을 ‘소비’하는 정치권은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정책과 의제를 가지고 당장 행동에 나서야 한다.
  청년 세대가 만들어나갈 사회가 생존경쟁만이 난무하는 정글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가 노인들에게 하듯이 그들에게도 안정적인 학업환경에다 따뜻한 복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하지 않은가. 젊어서 받은 애정과 보살핌이 그들의 심성을 아름답게 할 것이고, 그런 감수성이 우리 사회의 정서를 밝고 건강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때, 특정한 개인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전체의 행복이 보장될 것이고, 그런 공동체라야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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