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는 노동시간 단축의 역사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는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영국의 기계공들은 1872년경에는 노동 시간을 9시간으로 단축시켰고, 1880년경에는 토요일을 반공휴일로 만들어 주당 52시간만 일하는 ‘영국식 주말’이 널리 확산되었다’고 분석한다. 하루 15~16시간씩 일하던 산업혁명 초창기 이후 미국의 경영학자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은 인간의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노동소외 현상을 가속화했으나 주당 40시간 5일제 근무가 정착된 대한민국은 여전히 그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불철주야 일하는 것이 미덕인 대한민국의 자화상 때문이다. 
  21세기 고도의 정보화 사회에 접어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창의성이다. 노동 집약적 산업 시대가 저물면서 여가시간의 확대를 통해 개성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는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 homo ludens)’라는 말로 인간의 특징을 규정했다. 생존과 무관한 예술과 다양한 놀이문화의 발달은 현재 우리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생산성과 효율도 중요하지만 여유와 놀이가 창의적 인간을 만든다. 여가 시간의 확대는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며 레저스포츠와 문화 산업을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었으며 삶의 질을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사회계층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기도 한다. 여전히 더 많이 일해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들, 비정규직으로 일하며 노동시간 단축을 주장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여가 시간과 삶의 질은 서로 상충된 욕망일 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처 받지 않을 권리는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텔레비전에서는 힐링 캠프가 방송되지만 시청자를 위한 힐링 프로그램이 아니다. 산업화, 도시화의 가속화가 인간을 점점 더 빠른 속도로 변화시키고 있지만 시원적 삶에 대한 욕망은 인류에게 본능처럼 숨어 있다. 높푸른 하늘과 시원한 바람, 산과 강의 유려한 풍광을 즐기고 싶은 욕망은 캠핑 문화의 확산으로 이어진다. 문명의 발달과 보다 편리한 물질적 삶에 대한 욕망만큼 자연회귀에 대한 욕망도 강력하다. 힐링을 위한 캠핑 문화의 확산은 이처럼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우리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며 급속도로 이루어진 물질문명의 발달에 대한 피로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민들레는 장미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끊임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내가 가진 것을 점검한다. 최악의 청년실업으로 인해 20대에게 자기계발은 인문학적 소양과 삶의 방향성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아니라 자격증과 스펙 그리고 취업 준비의 다른 말이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자기만의 인생철학을 다듬어 가기엔 다양한 이념(–ism)보다 ‘먹고사니즘’의 문제가 더욱 절박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상처를 받았다면 자연이 좋은 위로가 된다. 캠핑은 내려놓고 덜어내기다. 복잡한 일상을 떠나 끝없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다. 물론 자연으로 돌아가 잠시 모닥불을 피워 놓는다고 해서 캠핑이 힐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보다 고급스런 장비와 조금 더 편리한 글램핑(glamping)으로 힐링을 외친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치료보다 예방이 중요한 것처럼 힐링보다 중요한 것은 상처받지 않는 일이 아닐까. 힐링보다 스탠딩(standing)이 필요하지 않을까. 
  스스로 결정하고 견뎌야 하는 시간이 어쩌면 힐링의 시간이다. 스탠딩은 홀로서기다. 타인의 욕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고 묵묵하게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바로 스탠딩이다. 힐링보다 스탠딩을 선택해야 하는 이유를 1883년, ‘모든 일을 게을리 하세. 사랑하고 한 잔 하는 일만 빼고, 그리고 한껏 게으름 피우는 일만 빼고’라고 외쳤던 폴 라파르그의 말이 설명해준다. 본질적으로는 우리의 삶이 그때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캠핑이 단순히 놀이와 문화의 차원을 넘어 스탠딩의 준비 시간으로, 자연과 인간을 생각하는 시간으로 기능해야 하는 게 아닐까.
류대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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