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대 국문학과 고 모 교수 투신’ 내 눈을 의심했다. 이렇게 피부에 와 닿는 기사는 처음이었다. 언론사 지망생으로 매일 신문을 읽었지만 흰 종이와 검은 글자만 훑고 있던 게 틀림없었다. 급한 마음에 선·후배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사가 실재라고 한다. 한참을 어안이 벙벙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저번 학기 수업을 들었던 학과 교수님의 죽음을 인터넷 기사로 확인하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음날 부산행 버스를 탔다.
  원래 학교 일에 관심이 없었다. 소위 ‘스펙 쌓기’를 위해 봄 학기를 휴학하고 서울에 갔다. 일종의 도피성 휴학이었다. 그동안 학교는 멍들고 있었다. 우리 과를 포함한 대부분의 학과는 교육부의 압박에 못 이겨 정원을 감축했고, 교수님들은 대학 민주주의로 상징되는 총장직선제를 수호하기 위해 천막을 폈다. 그때 총장님은 휴가를 다녀왔다. 사람들의 무관심을 관심으로 돌려놓으려 한 사람이 몸을 던졌다. 부끄럽게도 나는 기사를 접하기 전까지 그 모든 일들을 알지 못했다.
  ‘사람이 죽어야만 세상이 충격을 받아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사회는 야만사회다’(김동춘, 한국사회 ‘대전환’의 길, <창작과 비평> 2015년 가을호). 성완종, 유병언, 국정원 직원 자살 사건을 두고 쓴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의 이 문장은 이번 일에도 적용된다. 고 교수님은 유언장에서 자신의 투신을 ‘충격요법’이라 말했다. 교수님의 충격요법 이후, 일사천리로 직선제를 통과시킨 학교 측의 행동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에야 해결책을 제시하는 ‘야만사회’와 비슷하다. 교육부의 압박과 자본의 논리에 못 이겨 망설이는 그들을 전적으로 탓할 필요는 없다. 학교는 자연스레 국가를 닮아 있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야만은 내 안에도 있었다. 그것은 사회만의 속성이 아니었다. 삼백여 명의 사람들이 바다 아래로 가라앉고, 국가의 방역 망이 뚫려 사망자 수가 늘어나고, 대기업 하청업체 직원들이 첨탑 위에서 목숨을 잃어도 슬픔은 잠시뿐이었다. 충격도 서서히 잊혀졌다. 김동춘 교수가 지적하듯 나 역시 ‘수십 수백 명이 정치·사회적 이유로 죽어도 놀라거나 그들을 죽게 만든 상황을 돌아보지도 않고 해결책을 마련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이번 사건을 맞았다. 권력의 병폐가 곳곳에서 감지돼도, 누군가 죽어야만 이내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지 모른다. 고 교수님 말처럼 그렇게 조금씩 무뎌졌다. 무뎌지면서 그런 줄도 몰랐다. 
  40년 전 학생으로, 지금은 교수로 계신 머리 희끗한 선배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대학(University)은 우주에 있는 것 모두를 배우는 곳이라고 한다. 배움이 반드시 책 안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으로 절실하게 드러난 배움의 첫 단계는 스스로 야만을 벗는 일, 야만사회의 구성원이길 거부하는 일이 아닐까. 이 단계를 딛고 올라야 어렵게 들어와서 배운 학문이 바르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자유, 진리, 봉사 부산대의 교훈에는 대학생의 본분이 나타나 있다. 무딘 글귀와 고리타분할 수 있는 말들을 굳이 꺼내 기억하는 이유는 ‘야만사회’가 멀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일들에 부채의식을 느낀다. 아마도 외면과 망각에 대한 대가일 것이다. 꽤 오랫동안 이 빚을 진 채로 살아야 할 것 같다. 
강연우(국어국문학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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