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9년 8월 24일, 활기차고 아름다운 신흥도시였던 폼페이가 한순간에 화산재에 파묻혀 버렸다. 안타까운 재앙이지만 오늘날 폼페이는 마치 부활한 것처럼 관광객들로 붐빈다. 한국인 관광객도 적지 않은데, 대부분 한국인 관광객은 1~2시간 내외로 스치듯이 폼페이를 보고 떠난다. 반면 서양인들은 온 도시를 찬찬히 둘러보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여름이면 이곳은 지표 온도가 40~50도는 되는 듯한 폭염에 노출되는데, 걷기도 힘들 것 같은 할머니들까지도 도시를 뒤지고 다니는 것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폼페이는 2만 명 정도가 살던 도시였다. 항구도시이자 상업중심지이고 관광휴양 도시이기도 해서 유동인구와 노예들도 꽤 많았던 것 같다. 귀족의 대저택과 별장도 있고, 제빵업자, 무역상, 와인공장, 대규모 세탁소를 운영하는 중산층 규모의 상공업자도 있었다. 정원을 두고, 식당과 응접실을 갖춘 꽤 괜찮은 중산층 가옥, 노예들의 합숙소를 둔 공장형 가옥도 있고, 간단한 가재도구만을 갖춘 소형 주택들도 꽤 많다. 도시의 내부는 로마의 전형적인 정치 중심지인 포룸을 중심으로 관공서 지역, 신전구역, 주거구역, 상업구역, 별장구역, 서울의 잠실 스타디움처럼 스타디움을 둔 전원구역까지 도시 전체가 기가 막히게 구획되어 있다. 도시는 해자를 판 견고한 성벽으로 두르고 문을 냈다. 시의 동남쪽에는 서울의 시구문처럼 죽은 자들의 세계로 통하는 문도 있었다. 이 지역에는 갖가지 형태의 묘지와 묘비명들이 남아 있다.
폼페이가 멸망하던 때는 신라의 석탈해왕(재위 57~80)이 만년기를 보내던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현대 도시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이런 대단한 도시를 로마인들이 건설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어이가 없을 지경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은 한국 사람들은 매사에 건성이고 성급하다고 탄식한다. 어떤 분은 역사학자라는 분이 왜 이런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이느냐고 따진다. 역사학자라면 국민들에게 힘을 주고, 자신감을 가질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런 지적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힘을 주는 이야기이다.
한국 관광객들이 폼페이라는 도시를 깊이 있게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관광업계의 사정도 있겠지만, 폼페이의 도시 구조가 우리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반면 서양인들에게는 그런 현장감이 훨씬 생생하게 다가온다. 그 골목길과 가게를 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차이는 서양인과 한국인의 민족적인 차이에서 유발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똑같다. 단지 삶의 현장과 경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폼페이는 신흥 상업도시였다. 유적을 보면 주민들에게는 빵이 무료 공급되었거나 최소한 대부분의 가정들이 매식을 했던 것 같다. 도로 쪽으로 화덕을 설치하고 있는 가옥이 의외로 많다. 골목길, 가게들, 광장, 그들은 이런 구조를 보면서 자신들의 어린 시절을 발견하고, 그 재미에 빠져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반면 한국 관광객에게는 시간을 충분히 준다고 해도 먼저 지겨워질 가능성이 높다. 우리에겐 이런 도시가 예전에도 없었다. 한국전쟁 때 한국에 왔던 한 영국인 병사는 한국의 시골마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편지에 썼다. “한국에서 집이란 겨우 잠만 자는 곳이다. 마을에는 도시 기능이 하나도 없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이 로마인보다 무능해서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거의 2천 년간 중앙집권적 국가에 농업사회였다. 상업이 억제되니 빵가게도 공회당도 상가거리도, 도시구획도 대중 목욕탕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폼페이는 과도하게 위대하거나 낯설어 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시대와 인종에 무관하게 똑같다. 달라지는 것은 환경과 산업구조이다. 그 차이에 따라 욕망의 실현방식과 가치의 중요성이 바뀐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수많은 역사 속에서 인간의 변치 않는 욕망이 어떻게 구현되고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되풀이되고 반복되는지를 배울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변치 않는 욕망이 저지르는 무수한 잘못을 예방하고 수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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