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저장되려면 몇 가지 과정이 뇌에서 일어나야 한다. 우선 감각을 통한 정보 입력, 운동 실시, 또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하는 방식으로 뇌가 ‘경험’에 관여해야 한다. 보통 마취 중의 경험이 기억에 남지 않는 것은 뇌가 ‘경험’에 관여하지 않아서이다. 여러분이 외국어 단어를 잘 외우려면, 눈으로 단어를 보고(시각), 귀로 그 단어를 들어보며(청각), 입으로 따라서 해보고(운동) 그리고 자기 입에서 나온 소리로 들어보고(청각), 그리고도 단어를 써보고(운동), 그 단어가 어떤 다른 단어와 연결되어 쓰이는 것일까 생각(사고)도 해봐야 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기억은 이렇게 한동안 집중하면서, 가능한 한 많이 광범위한 뇌 회로를 써야 그만큼 기억에 잘 남는다. 같은 장기 기억이라도 강도 높은 정서가 발생하면(주로 생존에 아주 중요한 내용), 이때 뇌의 활동 결과는 의도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기억이 저장된다. 이런 기억은 다양한 회로가 관여한 것이 아니며, 매우 강렬 단순, 원초적이다. 때로는 어떤 행동방식을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영구적으로 저장되어 나도 모르게 정해진 방식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이런 기억은 주로 여러 번의 반복이 필요하다. 이런 기억의 결과 피아노를 잘 치게 되기까지 뇌는 수없이 이 동작을 반복하고, 그때 활용된 뇌 신경망이 서서히 강해지는데, 그러면 나중엔 마음만 먹으면 피아노를 잘 치게 된다. 심지어는 어릴 적부터 반복해서 행동해서, 이빨 닦기처럼 아주 자동적으로 절차를 수행할 수 있게 될 때 이는 습관이라고 부르는 기억의 한 형태인데, 이도 역시 신경망의 영구적 변화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생물학적으로 위의 말한 이런 변화가 일어나려면, 뇌에선 신경망, 회로에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기억저장의 핵심이다.
  신경계의 경험 의존적인 이런 변화는 꽤 오래가는 것이어서, 도자기 만들 때 흙을 주물거리고 만지면 모양이 달라지는 것 같은 어떤 영구적 변화가 생겨, 이를 ‘신경 가소성(neural plasticity)’이라고 한다. 인간의 신경 가소성은 자라나는 초기에 어마어마하게 높고, 나이가 들면서 줄어드는 경향이 있어 외국어를 배우는 게 나이 들면 그만큼 어려운 이유이다. 즉, 기억 저장에는 뇌에서 시냅스의 연결성, 뉴런들 간의 정보 전달의 효율성이 증가 또는 감소라는 변화가 수반된다. 이는 신경세포인 뉴런들 간의 정보 전달이 더 효율성을 가지는 방향으로 수상돌기 가시의 증가 같은 구조 변화나 신경전달 물질 통과 채널의 생성 증가와 관련된 화학적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가능하다. 이런 전기적, 생화학적 활동의 변화는 또한 신경계 단백질 생성이 요구되는 재공사(마치 고속도로에 나들목을 내는 것처럼)가 필요한 것이고, 결국 유전자 활동의 변화로 장기기억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유전자 수준에서 생각해 보면 이런 신경계의 구조·기능적 변화는 우리 염색체의 어떤 유전자가 활동을 더 하거나, 유전자 발현이 억제되는 과정과도 관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기억 저장에서 중요한 것은 이런 ‘경험’때문에 신경계가 반영구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학습과 기억을 포함한 모든 경험이 뇌에 변화가 ‘반영구적’으로 생긴다. 소위 ‘기억’이라는 정보 자체의 저장 말고도 내가 어떤 사고나 감성을 느껴보는 경험, 내가 무엇인가 참아보는 경험, 열심히 해보는 경험, 계획을 세우고 지켜보는 경험도 뇌의 어딘가에 회로의 효율성 향상의 형태라는 변화로 저장된다. 왜냐하면 이런 능력도 뇌의 회로가 움직여야 되는 것이고, 여러 번 써볼수록 그 방향으로 뇌 회로가 증폭되는 경향이 생기고, 그러다가 반영구적인 형태로 고정되기 때문이다. 세상 버릇 여든까지 가는 이유가 이것이다. 기억이 회상되는 것은 역시 이 회로와 관련이 있다. 회로를 복잡하게 써서 잘 뇌에 적어놓으면, 일부만이 활성화되어도 회로의 다른 부분까지 흥분이 전달될 수 있다. 즉 기억해 내야 할 내용의 일부만 알아차리면, 나머지 기억이 줄줄 잘 딸려 나올 수 있다. 학습할 때 연결성을 효율적으로 잘 구성하면(이해를 통해서 가능), 하나만 기억 잘 해내면 열 개가 줄줄이 생각날 수 있다. 공부 관련된 기억을 잘하는 사람의 숨은 비결이다. 물론 뇌에 저장된 기억은 수첩에 적어놓은 메모나 사진이 보관된 사진첩처럼 영구적이지도 고정적이지도 않다. 새 경험으로 이전 기억 위에 새로칠해지기도 하고, 생생했던 기억이 약해지기도 한다. 살아있는 생물의 기억이 컴퓨터 저장과 다른 이유이다. 

강원대 강은주 (심리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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