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리-북경남 송전선 시리즈] ①밀양 행정대집행, 그 후 1년

 

 
  부산광역시 기장군 신고리원전 3호기에서 북경남 변전소를 잇는 765kV 초고압송전선로. 이 송전탑이 세워지기까지 주민들의 반대가 극심했다. 2012년 이치우 씨의 분신자살 사건으로 촉발된 송전탑 건설 반대 운동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에 <부대신문>은 두 차례에 걸쳐 이 문제들을 짚어보기로 했다. 
  첫 번째 기획은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밀양’ 프로젝트에 참가해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구성했다. 전국의 미디어 활동가들이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류 미디어에서 다루지 않는 현장의 이야기를 영상, 소리, 잡지 등의 매체에 담는다. 기자도 ‘미디어로 행동하라’에 참여해 5일 동안 밀양에 머물면서 밀착 취재했다. 그곳에서 주류 신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밀양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송전탑이 세워지고 내 억장은 무너졌다”

 

 
   지난 6월 2일 오전, 밀양역 앞에서 1번 버스가 삼문동 233-11번지의 ‘너른마당’을 향해 달려갔다. ‘밀양 송전탑 반대 대책위원회(이하 밀양대책위)’의 사무실로 쓰이는 그곳. 이름과는 달리 좁은 건물이었지만 밀양 주민들이 잠시 쉬어갈 수도 있는 아늑한 공간이다. 그곳에서 바쁘게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한 남성이 있었다. 밀양대책위 이계삼 사무국장이었다. 그는 ‘미디어로 행동하라’에 참가한 기자에게 친절히 취재에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인터뷰 할라카면 말씀 잘하시는 분, 단장면에 두 분 있으니까 글로 가면 될 겁니다”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3일, 본격적인 취재를 위해 경남 밀양시 단장면으로 향했다. 차창 밖으로 길게 이어진 송전선과 송전탑들이 끊이지 않았다. 보라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밭 한가운데에 송전탑이 놓여 있었다. “저런 곳에도 송전탑이 세워져 있네요?” 기자의 물음에 차를 운전하던 시민 활동가가 한숨을 쉬며 답했다. “원래는 저 자리가 풀이 무성하게 나 있어야 할 자리야. 저 땅 주인은 얼마나 속이 문드러졌겠어”라고 말했다. 절반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밀양 주민들에게 땅은 곧 ‘자신의 일부’다. 그런 밀양 땅에 765kV의 송전선로 건설이 승인된 것은 2007년. 이후 7년간 69개의 송전탑이 들어섰다.  
 
공권력의 위협은
끝이 없다
 
  차로 20여 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박은숙(경남 밀양시, 43) 씨 댁이었다. 그곳에는 박은숙 씨와 절친한 사이인 권귀영(경남 밀양시, 55) 씨도 함께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기자와 함께 근처의 국수집에서 식사를 했다. 
  작년 행정대집행 때의 기억을 더듬던 권귀영 씨는 “경찰들이 우리를 사람으로도 안 보는 거 같드라. 사람으로 봤으면 우리한테 침 뱉고 욕을 했겠나”라고 말했다. 작년 6월 11일, 밀양시청은 송전탑 건설 현장의 반대 농성장을 철거하기 위해 행정대집행을 실시했다. 송전탑 건설을 강행하기 위해 공권력을 투입한 것이다. 이날 투입된 공권력은 경찰 20여 중대와 250여 명의 한국전력공사 직원들이었다. 그들과 주민들 간 대치 상황이 벌어져 주민 20여 명이 다치기도 했다. 박은숙 씨는 “공권력을 가진 지들이 밟고 있으면서, 우리들이 꿈틀거린다고 뭐라 한다”고 말했다. 
  행정대집행 이후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밀양은 공권력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국수 그릇이 비어갈 때쯤, 박은숙 씨가 어제 걸려온 통화를 녹음했다며 기자에게 들려줬다. 휴대전화에서는 검찰이 박은숙 씨의 남편인 ‘동화전마을 반대대책위원회’ 김정회 위원장에게 협박을 가하는 대화가 흘러나왔다. 통화 내용에서 검찰청 집행계장의 목소리는 단단히 벼른 듯했다. ‘내가 DNA 채취하러 갈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으소’. 이어 김정회 위원장은 ‘영장도 없이 어떻게 DNA 채취를 합니꺼’라며 코웃음을 쳤다. 집행계장은 ‘지금 웃음이 나오지요?’라며 ‘영장 받아서 수갑 채워 갈 테니 각오하세요’라고 했다.
 
잊혀지지 않는 그날, 
지워지지 않는 후유증
 
  식사를 마친 뒤 박은숙 씨와 권귀영 씨를 따라 대파를 심어놓은 비닐하우스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파를 뽑고 다듬는 작업을 시작했다.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며 가장 힘들었던 때가 언제냐’라는 기자의 물음에 권귀영 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집 앞에서 송전탑 공사가 강행됐던 2012년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헬기가 올라 공사 자재를 옮겨사코, 집 앞에는 트럭이 수십 대나 왔다 갔다 하드라. 처음에는 화만 나드만 갈수록 심장도 두근거리고 어지럽기까지 하데”.
  권귀영 씨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적도 있다고 고백했다. “나는 웬만해서는 스트레스 안 받는다. 근데 이거는 완전히 사람 속을 다 뒤집어 놓는기라. 참다 못해서 결국에는 약 먹고 확 죽어버릴까 생각했지” 담담하게 말했지만 권귀영 씨의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비닐하우스에서 나와 걸어서 5분 거리인 이차순(경남 밀양시, 82) 씨의 집으로 갔다. 이차순 씨 역시 송전탑 공사 당시 목숨을 잃을 뻔했던 경험을 토로했다. 그는 하마터면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쓰러질 뻔 했던 것이다. “헬리콥터가 너무 댕기니까 속도 안 좋고 머리도 아프데요. 그래서 저 밑에 한솔병원에 가서 약 타 먹었지요. 근데 약 타온 거 보니까 다 하얗고 동그란 수면제데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한솔병원은 한국전력공사가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 검진을 받을 수 있도록 지정한 곳이다. 이 말을 들은 밀양 송전탑 반대 활동가는 얼굴을 화를 내며 “웬만해서는 이 정도의 수면제를 처방 잘 안 해주는데, 이건 사람 죽으라고 주는 거지”라고 말했다.
 
“그놈의 합의 때문에
마을이 두 동강이 나뿟다”
 
  한국전력공사는 밀양 주민들과의 갈등이 오랫동안 이어지자 회유책을 제시했다. 송전탑 건설을 찬성하는 주민들에게 합의금 명목의 돈을 제시한 것이다. 이에 따라 밀양 주민들은 ‘돈을 받고 합의한 사람’과 ‘합의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었다. 박은숙 씨는 “몇 달 전에는 합의금 때문에 마을 주민들 간에 패싸움도 일어나고, 경찰도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말했다. 
  박은숙 씨와 권귀영 씨는 한 주민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여느 사람들처럼 뒷담화를 나누는 아주머니들 얘기인 줄로만 알았지만 사뭇 내용은 진지하다. “그 사람 며칠 전에 합의했다 카드라”. “그렇게 앞장서서 우리보고 싸우자 하드만”.
  한국전력공사는 송전탑 건설에 합의한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관광 여행을 보내주기도 했다. 권귀영 씨는 “요 앞에 사는 할매, 기어코 한전 놈들이 보내주는 여행 갔다 왔다 카데”라고 말했다, 이에 박은숙 씨도 “어쩐지 저 앞에 큰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드라. 나는 죽어도 그놈들이 보내주는 관광은 안 갈끼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작년 말, 끝내 밀양에 송전탑 69기가 완공됐다. 송전탑이 세워져서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하는 주민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존재했다. 귓가에 계속 두 사람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옛날부터 송전탑 건설 백지화 계를 만들어 계비를 모으고 있어. 송전탑 건설이 무산되면 일주일쯤 다 같이 떠나보려고…”. 그들의 희망에 찬 목소리가 산허리의 송전탑에 휘감기는 듯했다.
 
송전탑 건설 당시, 한국전력공사가 지정한 병원에서 이차순 씨가 처방받은 수면제들을 내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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