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을관계는 생소한 것 같지만 이미 정착된 용어이다. 컴퓨터 자판에서도 갑을관계를 치면 오탈자를 표시하는 빨간 줄이 그어지지 않는다. 갑을관계는 원래 계약서를 작성하는 쌍방을 지칭했다. 그런데 이제는 갑은 지위가 높은 사람, 을은 지위가 낮은 사람을 뜻하는 것처럼 사용되고 있다. 갑이 자신의 우월한 지위를 을에게 오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갑질’이란 용어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갑을관계는 이전부터 존재해 왔지만 그것이 우리 사회의 본격적인 화두가 된 것은 아마도 작년 하반기에 방송된 드라마 <미생> 덕분이었던 것 같다.<미생>은 계약직 사원인 장그래가 고군분투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박진감 있게 표현했다. 그는 능력도 있었고 노력도 열심히 했지만, 계약직이라는 이유 때문에 수많은 갑질을 받아야 했으며 결국 정규직으로 전환되지도 못했다. 장그래의 이야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공감을 얻었으며, “우린 아직 다 미생이야!”는 지금도 주옥같은 대사로 남아 있다.
드라마 속의 갑을관계는 소위 ‘땅콩회항’ 사건을 계기로 실제적인 현실로 급부상했다. 2014년 12월 5일 대한항공의 조현아 부사장은 기내에서 땅콩 제공 서비스를 문제 삼아 난동을 부린 데 이어, 비행기를 되돌리게 했고 수석 승무원을 하기시켰다. 대한항공은 처음에 조현아를 옹호하는 작태를 보였으며, 국토교통부의 조사 결과도 봐주기 의혹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실 관계가 확인되면서 결국 조현아는 실형을 선고받는 신세가 되었다. “나는 개가 아니라 사람이다!”는 승무원의 발언은 너무도 가슴 아픈 충격이었다.
최근에는 우리 대학에서도 갑을관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급습했다. 지난 8월 17일에 국어국문학과의 고현철 교수가 총장 직선제 폐지 추진에 항의하면서 투신하는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동안 교육부는 해당 대학 교원의 합의된 방식과 절차에 따라 총장을 선출한다는 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재정 지원을 무기로 삼아 직선제를 포기하도록 압박해 왔다. 게다가 직선제가 아닌 간선제로 선출된 총장 후보도 총장으로 임명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고현철 교수는 대학이 진정한 민주주의 수호의 최후의 보루라고 역설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무뎌져’ 있는 민주주의에 대한 각성을 촉구했다.
그렇다! 그 동안 우리 사회는 민주적 의사소통에 너무 둔감해졌다. 방송으로 인기를 누리거나 실정법을 어기는 사태가 발생하거나 투신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이 있어야만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가 아닌가?
갑은 을의 존재를 전제로 하며, 갑의 권력은 을에게서 나온다. 때문에 갑이 을을 짓밟는 것은 일시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나 영원할 수는 없다. 갑은 내 회사, 내 학교, 내 나라라는 편협한 관점을 넘어 우리 회사, 우리 학교, 우리나라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을의 정당한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 집단이나 조직에게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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