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 시리즈] ① 윤동주와 한·일관계

 
  올해는 우리나라가 광복 70주년과 한·일 수교 50년을 맞은 해이다. 더불어 <서시>, <별 헤는 밤>과 같은 시를 쓴 저항 시인이자, 대한민구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한 윤동주의 서거 70주기이기도 하다. 스물여덟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한 청년 윤동주의 인생을 돌아보고,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 문제 등으로 어느 때보다 차가운 한·일 관계 속에서 그가 남긴 흔적의 의미를 짚어보았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동쪽(조선)을 밝게 한다는 마을인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시기에서 드물게 국사와 우리말을 교육하는 △명동 소학교 △은진중학교 △숭실중학교를 거치면서 그는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나갔다. 그는 22살이 되어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에 입학했다. 시를 계속 쓰기 위해 문과에 진학하고자 했고 의과 진학을 원하는 아버지와 심한 갈등을 빚기도 했다.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한 후는 그가 가장 문학적으로 창작력이 융성했던 시기이다. 그의 유명작인 <서시>, <참회록>, <자화상> 등도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하나같이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강하게 서려 있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와 함께 닥친 어쩔 수 없는 창씨개명은 그를 큰 고뇌에 빠트렸다. 지난달 2일부터 사흘간 일본 교토와 후쿠오카에서, 윤동주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지녔던 고뇌의 발자취를 따라가 봤다.


평화로운 일상의 공간에서 찾은 고뇌의 자취

  윤동주가 1942년부터 세상을 뜨기까지 재학생으로 있었던 도시샤대학은 여느 대학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학교였다. 윤동주는 릿쿄대학에서 이곳 도시샤대학으로 편입했다. 릿쿄대학이 도쿄에 위치한 탓에 군사훈련을 강하게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바다 건너 타국, 일본말만이 오가는 도시샤대학 교정 한 켠에는 우리말로 써진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었다. 시비 앞에는 그를 기리는 태극기와 헌화가 있었다. 그가 남긴 유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어서 그가 유학 시절 생활했을 하숙집터를 찾아가 보았다.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안내요원에게 그의 이름만 대어도 약도를 받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새롭게 들어선 건물에 윤동주 하숙집터라는 동판과 시비만이 남아있었다. 아쉽지만 그가 고뇌했던 하숙집은 상상으로 채울 수밖에 없었다.

 윤동주가 구금됐던 시모가모 경찰서는 신식 건물로 재건축됐다

  같은 날 찾아간 시모가모 경찰서는 유유히 흐르는 타카노 천(川)을 마주하고 있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경찰서의 외관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평범한 모습과는 다르게, 윤동주를 비롯한 조선인들의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다. 윤동주가 우리말로 쓴 시를 써 조선의 독립을 꾀한다며 일본이 <치안유지법> 위반을 명목으로 그를 체포해 구금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2년의 징역형을 받게 된 시발점이 된 곳이다. 이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곳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교토에서 비행기로 1시간 거리에 위치한 후쿠오카에서는 후쿠오카 형무소를 방문했다. 윤동주는 바로 이곳에서 복역을 하던 중 사망했다. 후쿠오카 형무소가 있었던 자리에는 전부 주택가와 학교가 들어서 있었다. 그를 위한 추모식을 했을 공터에는 아이들이 놀고 있었다. 곳곳에 어둡고 오래된 형무소의 콘크리트 벽만이 남아 슬픈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1945년 2월 16일 입춘 지나 봄의 문턱 앞에서, 윤동주는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28년의 짧은 생을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보내다 일본에서 눈 감은 윤동주. 저항시인이자, 대학생으로서 끝마친 그의 삶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깊은 자기반성의 기회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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