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생존하고 있는 원자폭탄(이하 원폭) 피해자는 2,600여명, 그중에서도 650명이 경남 합천군에 거주하고 있다. 합천에 살던 조선인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강제 징용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히로시마'로 불리는 합천, 그곳에서 그들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이수영 할머니(히로시마 원폭 피해자)

 

  깨어보니 피바다 위에 있었어요. 건물의 창문을 덮던 유리는 온데간데없고, 천장도 사라졌어요. 파편이 박힌 다리에서 피가 철철 났어요. 하늘에서는 검은 비가 내렸지요. 그 검은 비를 맞으며 걸었어요. 둑에 피해자들이 몰려있었는데, 그곳에는 전신의 살이 벗겨진 사람, 다리가 없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사람이지만 다들 사람이 아니었지요. 큰 배가 있었는데, 다친 사람들만 타라고 했어요. 다친 다리를 치료해준다기에 배에 올라탔습니다. 그곳은 피비린내로 가득했어요. 살이 다 벗겨진 사람들 주변으로는 파리가 꼬였어요. 

  치료를 받고 5일 만에 집으로 갔습니다. 가는 도중에 히로시마의 풍경을 보았는데, 여기저기 시체가 쌓여있었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분간도 안 됐어요. 개도 죽어있고, 말도 죽어있고, 사람도 죽어 있고. 가족 생각에 쉴 새 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수 없었어요. 차를 타고 집에 도착했는데 우리 집이 반쯤 찌그러져 있었어요. 가족들이 있었는데, 나를 알아보지 못했어요. “어머니”하고 불러도 이상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어요. 어머니는 나를 위해 미숫가루를 찧고 있다 말씀만하셨어요.

심진태 할아버지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진 일본에서보다 조국에서의 상황은 더 좋아지지 않았어요. 겨울에도 상처에서 물이 줄줄 흘렀죠. 사람들이 원폭 피해자들을 나병환자라며 냉대했습니다. 그때는 가장 꺼리는 것이 나병 환자였거든요. 문둥이라고, 가까이하면 문둥이가 옮는다고 해서요. 우리 스스로도 원폭 때문인지 몰랐기 때문에 나병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어요. 원폭 피해자 집에 미군들이 전염병인 줄 알고 집에 기름을 부어서 불을 지르기도 했었지요.

  피폭자 중 글을 아는 사람들과 부자들은 피폭자라는 것을 숨겼어요. 유전적 문제나 사회적 냉대 때문이겠죠. 지식인들이 이렇게 입을 닫고 있으니, 우리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우리 같이 무식하고 못 가진 사람들이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고 나서도 소용이 없었어요. 종전 70년이라고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전쟁을 치르고 있어요.

한정순 할머니

  저는 원폭 피해자 2세입니다. 원폭 투하 당시 저희 부모님과, 할아버지, 할머니, 7명의 삼촌, 언니, 오빠 이렇게 14명의 가족이 히로시마에 있었다고 해요. 어머니는 당시 임신 중이었지요. 뱃속에 있던 오빠는 태어난지 얼마 안돼 원인 모를 병으로 세상을 떠났어요.

  조국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고향에서 6남매를 낳았어요. 우리 6남매 모두 이런저런 질병으로 평생을 고통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째언니와 둘째언니는 뇌경색, 셋째와 다섯째인 저는 대퇴부무혈성괴사증이라는 병으로 여러 번 인공관절 수술을 해야 했어요. 넷째 오빠는 심근경색, 협심증 수술 여러 차례, 여섯째인 동생은 치아가 모두 빠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원폭의 흔적은 우리 6남매에서 끝나지 않았어요. 원폭 피해자 3세인 제 아들은 뇌성마비 장애를 갖고 태어났습니다. 아들의 나이가 벌써 33살이지만,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어요. 먹는 것부터 대소변까지 제가 다 보살펴주어야 해요. 나무토막같이 굳어버린 아들을 보며 피눈물을 흘리는 어미의 심정을 누가 알아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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