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프라스 정부가 국민투표를 동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재정위기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장기 국면으로 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치프라스는 왜 도움도 안 되는 국민투표를 한 것일까? 그리스 위기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우선 명확한 건 국민투표 의제가 긴축 반대였지 유로존이나 유럽연합 탈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국민투표의 목적이 채권단 특히 독일을 압박해서 부채탕감이나 채무재조정을 얻어내는 것이었지, 그리스가 유로존이나 유럽연합을 탈퇴할 것인지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죽기 직전에 사즉생의 배수진이 아니라 속이 뻔한 수를 내놓은 것은 치프라스의  실패를 예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시리자와 치프라스는 채권국과 채권은행에 패배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자국 국민들을 기만했으며 그들의 고통을 연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혹자는 국민투표가 무자비한 국제금융집단의 횡포에 대한 그리스 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주장했지만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국민투표는 민주주의가 무능하고 무책임한 정부의 핑계거리나 책임회피 수단이 되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 사례이다. 
  과도하게 자유화된 국제 자본주의 체제에서 민주적 정통성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민주적 항거를 정당성 있게 행사했더라도 금융집단과 그 대리인들을 민주적 통제 하에 두기는 불가능하다. 국내 금융집단을 정부의 민주적 통제 하에 두기도 어려운데, 국제 거버넌스나 국제정부가 부재한 상황에서 국제금융을 민주적으로 통제한다는 것은 이상적인 소리에 가깝다. 따라서 그리스 문제에서 민주주의적 접근은 탐욕스런 자본에 대한 저항운동 차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의 실질적인 해결책은 아니다. 디폴트 사태는 국제금융체제의 구조와 운동성향을 이해하고 기술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이지 민주주의 문제로 환치시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금융의 세계화 시대에 어떠한 통화제도도 환율안정성, 통화유동성, 국가의 통화자율성이라는 세 가지 목적을 모두 달성하기는 어렵다. 잘 해야 두 가지를 얻을 수 있다. 유로존은 회원국들이 자국의 통화자율성을 포기하는 대신 환율안정성과 통화유동성을 확보한 금융통화체제이다. 따라서 정책기술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리스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우선적으로 추구하느냐에 따라 그리스의 앞날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환율안정성과 통화유동성을 계속 추구하면 유로존에 남을 것이고, 통화 주권의 자율성을 추구하면 유로존을 탈퇴하여 자국통화로 복귀하는 시나리오가 된다. 그런데 지금 그리스는 유로존 내에서 정책자율성도 없고 통화유동성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여기에 더해 그리스는 유로를 계속 사용함으로써 아예 환율자율성도 없다. 수출 경쟁력 확보도 어려운 것이다. 
  그리스가 고통의 시간을 벗어나는데 중요한 건 긴축과 복지축소가 먼저냐 아니면 민주적 대응이 먼저냐의 문제가 아니다. 자국 금융통화체제의 안정을 위해 자율성, 안정성, 유동성 중 어떤 목표를 최우선시해서 선택할 것인지를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세 가지 목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순간 그리스 문제는 더욱 장기화되고 그리스 국민의 생활은 더욱 피폐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찰스 킨들버거는 이미 1970년대에 “국제금융체제는 본질적으로 광기와 공포, 그리고 붕괴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21세기 현실은 킨들버거의 주장이 과한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개도국에서만 발생하던 위기는 이제 미국과 그리스 등 선진국으로도 파급되었다. 불안정한 국제금융통화 체제에서 환율위기, 외채위기, 금융위기, 재정위기는 더 이상 개도국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 것이다. 불안정한 국제금융통화 체제는 어느덧 흉폭한 파괴적 괴물이 되어버렸다. 
  그리스 문제는 결국 채권단이 이겼다는 점에서 자본이 얼마나 집요하고 결정적으로 우세적 지위를 지니고 있는지 확인해준 사례이다. 민주주의는 과도하게 시장화 된 국제금융체제에서 자본주의를 이기기 어렵다. 금융의 세계화 시대에 존재하는 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자본의 힘과 자유뿐이다. 과도하게 자유화된 국제금융은 이제 인간의 통제를 상당 부분 벗어났으며, 일국 민주주의도 그리고 유럽연합 같은 지역협력으로도 통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  어떤 것도 자본만큼 자유롭고 힘 있지 못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진시원
일반사회교육 교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