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론의 아버지 찰스 다윈은 이렇게 푸념했다. “공작새의 꼬리깃은 정말 나를 짜증나게 한다니까!”
그가 유독 공작새를 미워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공작새의 그 멋들어진 꼬리깃이 생존에 도움이 되는 형질이 살아남는다는 자연선택의 규칙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다윈의 짜증은 자연선택에 성선택 개념을 도입하면서 사라졌다. 생명체들은 생존도 중요하지만 번식도 못지않게 중요하다. 하지만 짝을 찾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수컷들은 종종 짝을 찾는데 목숨을 건다. 비단 수공작 뿐 아니라, 붉은색 목주머니를 뽐내는 수컷 군함새, 목청이 터져라 울어대는 수개구리, 비단처럼 부드럽고 긴 꼬리를 흔드는 수컷 구피까지. 세세한 표현 방식은 달라도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똑같다. ‘그대여, 제발 나를 선택해 주오’라는. 흥미로운 건 이들이 자기 과시 전략으로 선택한 것들의 공통점은 사는 데 하등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라는 사실이다.
  맞다. 사실 쓸모없는 수준을 넘­어서 생존에 방해가 될 정도다. 대개 이런 형질은 이성의 눈길 뿐 아니라 천적의 감시망에도 포착되기 쉬운 특성이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왜? 이에 대한 논리적인 설명은 ‘적응도 지표’의 개념이다. 특정 형질의 ‘쓸모없음 지수’가 상승할수록 개체의 적응도는 높게 나타난다. 공작새 수컷에게 무겁고 큰 꼬리는 분명 생존에 걸림돌이 된다. 때문에 그런 걸림돌을 가졌음에도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이들을 돋보이게 하는 매력이 된다. 실제로 깃털이 무겁고 색이 화려한 수컷일수록 건강상태나 영양상태가 좋았고,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좋았다는 보고가 있다. 사실 암컷들은 수컷의 꼬리가 ‘예뻐서’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토록 쓸모없고 위험한 자질들을 주렁주렁 달고도 살아남은 그들의 생존력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이처럼 한 개체가 자신의 자질이 남들보다 우수함을 알리는 표지들을 ‘적응도 지표’라고 한다.
  이건 인간들의 시각으로 해석한 것이고, 어쨌든 자기를 과시하는 수컷들이나 그런 수컷들을 선택하는 암컷들이나 이성적으로 적응도 지표를 해석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들은 이러한 경향을 지닌 유전자가 명령한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매력적으로 느끼는 요소들—좌우대칭의 신체, 매끄러운 피부, 윤기나는 머리카락 등—은 모두 유전과 환경적 요인이 만족스러울 때 나타나는 특질들이다. 사람은 몸 그 자체 뿐 아니라 인위적인 것들도 적응도 지표로 활용하고, 여성들도 그 과당 경쟁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여기서 각 성별들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자동차와 명품백이다. 모터쇼에 전시된 슈퍼카 옆에 남자들이 득실득실한 것은 분명 레이싱 모델들의 매력 때문만은 아니며, 일 년 치 연봉에 달하는 명품백을 팔에 걸고 다니는 여자들이 수두룩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렇게 별로 필요하지도 않는 곳에 돈을 써도 될 만큼 내가 가진 자원이 많음을 과시하는 사람에 특화된 ‘적응도 지표’인 것이다.
  여기서 문제는 동물들 못지 않게 사람들도 적응도 지표의 본질적 기능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적응도 지표는 실제의 생물학적 기능을 반영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임에도 우리는 종종 겉보기 적응도 지표에만 치중해 실제 생물학적 기능을 희생하는 우를 범하곤 한다. 마치 꼬리깃의 길이에만 치중해 가짜 꼬리라도 길기만 하면 얼마든지 ‘OK’하는 암컷 천인조처럼, 겉보기 등급을 올려줄 잉여로운 부산물에만 치중하다가 실제 자신과 가족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자산을 낭비하는 어리석음 말이다. 게다가 사람의 적응도 지표는 동성의 경쟁에서는 의미가 있을 수 있어도, 이성의 관심을 끌기에는 부족하다는 웃지 못할 오류까지 동반한다. 남자들은 자동차의 배기량과 스피드, 엔진 출력을 비교하며 은근히 경쟁하지만 정작 여성들은 이런 수치들에 별 관심이 없으며, 여성들은 다른 여성의 팔에 걸린 명품백의 로고와 라인명을 잽싸게 스캔하지만 정작 남성들은 그것이 명품인 줄조차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시시때때로 지름신이 강림해 괴롭다면, 누군가의 화려한 겉모습에 반해 이끌리고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보자. 나는 지금 겉보기 지표를 무작정 따르는 원시적 본능에만 굴복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은희 과학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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