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기에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고, 기억하기 싫은 것은 잊어버린다고 말한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준다’며 시간이 흐르면 나쁜 기억이 흐려질 거라 위로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 기억이 있다. 5·18민주화운동이 그중 하나다.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그해의 광주는 현재진행중이고, 여전히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소설 <소년이 온다>는 1980년 5월, 열흘간 광주에서 일어난 처참한 일들과 그 속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맞서 싸우던 중학생 동호와 그 주변인의 이야기를 각기 다른 화자와 시점으로 담아냈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이들의 단 한 번뿐인 삶이 어떻게 부서져 버렸는지 작가는 담담한 필체로 절절히 복원해 우리에게 보여준다. 살아있다는 것이 오히려 고통스러운 사람들, 그때의 기억이 평생을 쫓는 악몽이 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적 단면을 드러내고 있다.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날 군인들이 지급받은 탄환이 모두 팔십만 발이었다는 것을. 그때 그 도시의 인구가 사십만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모든 사람들의 몸에 두 발씩 죽음을 박아넣을 수 있는 탄환이 지급되었던 겁니다. - <소년이 온다> 중
  주인공이자 ‘너’인 열다섯 소년 동호는 친구 정대가 계엄군의 총탄에 맞아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공포에 질린 동호는 친구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상무관에서 밀려드는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돕던 소년은 ‘반드시 집으로 돌아오라’는 어머니와 형의 말을 뒤로 한 채 도청을 지키다 결국 총탄을 맞게 된다.
  또 한 명의 소년이 있다. 미처 여름을 건너지 못하고 ‘살덩어리’와 ‘핏덩어리’가 돼 버린 정대. 수많은 시신들과 함께 후미진 곳에서 태워져 혼만 남은 정대는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 절규할 뿐이다.
  가까스로 목숨은 건졌지만 삶의 시계가 80년 5월에 멈춰버린 사람들도 있다. 동호와 함께 상무관 시신을 지켰던 은숙 누나는 검열과를 오가는 출판사 직원으로 살아간다. 동호를 남겨둔 채 도청을 빠져나와 살아남은 은숙 누나는 고름 같은 눈물을 삼키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군인들에게 끌려가 지옥 같은 고문을 당했던 진수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들은 ‘밤낮없이 짊어지고 있는 더러운 죽음의 기억이 진짜 죽음을 만나 깨끗이 나를 놓아주기를’ 기다린다.
  그때 광주 시민들이 맞서야 했던 상대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이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애써 목숨을 부지하려 든 이도 없었다. 왠지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깨끗하고도 무서운 양심’이 그들을 붙잡았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시민들은 군인들을 향해 차마 총을 쏘지 못했다. 삶과 죽음이 무참히 엇갈렸던 그때, 왜 누구는 죽어야만 했고 다른 누구는 살았는지를 설명해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 잊을 때도 되지 않았냐고, 국가 전복을 위한 폭동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건네주고 싶다. 어떤 이에게는 책에서 마주한 이야기일 뿐이지만, 아직도 대한민국에는 수많은 동호와 정대,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냥 한 권의 책을 읽었다며 덮을 수가 없다. 책을 다 읽었다고 해서 끝난 이야기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따라다니며 고통을 주는 그때. 참으로 끔찍했던 시기, 그들의 고통이 있었기에 우리는 무사히 오늘에 이르렀다.
  ‘소년이 온다’. 역설적인 제목이다. 소년은 영영 가버렸다. 키가 자라고 싶었고, 팔굽혀펴기를 마흔 번 연달아 하고 싶었고, 언젠가 여자를 안아보는 것이 꿈이었던 소년은 그렇게 갔다. 하지만 그 혼들은 끊임없이 우리를 향해 오고 있다. 참혹했던 그때가 우리 시대에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일깨우기 위해 그렇게 소년이, 온다.

   
 <소년이 온다>
한강 저/2014/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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