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주(공공정책 12)

   영화 <장미의 이름>은 움베르트 에코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것으로 꽤 긴 상영시간에도 집중력이 떨어지지 않는 영화였다. 영화는 훗날 이 사건을 회상하는 아드조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인 바스커빌의 윌리엄과 그의 수습사제 아드조가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토론을 위해 베네딕트 수도원으로 향한다. 두 사람은 수도원장의 부탁으로 우수한 채석사 아델모의 죽음을 조사하게 되고 얼마 뒤 수도사 베넨티오, 베렝가리오가 차례로 의문의 죽음을 맞으면서 수도원은 불안에 휩싸인다. 한편, 교황청에서 파견한 베르나르 기가 도착해 별도로 범인을 조사하고, 윌리엄과 아드조가 숨겨진 비밀서고를 찾으면서 수도원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영화의 중간쯤, 화려한 붉은색 옷을 입은 다른 종파의 사절단과 프란체스코파는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해 담론을 펼친다. 이 부분에서 나는 ‘인간만이 종교를 섬겨야 하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으며 인간은 종교를 섬기는데 부적합하단 생각을 했다. 영화 속 화려한 사절단의 차림새와 종교에 대한 인간의 광기, 역사적으로 종교의 이름하에 행해진 일들은 대게 전쟁과 갈등이 종교에 대한 염증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심지어 모든 종교가 주장하는 바는 평화와 박애다!) 종교는 마치 물과 같다. 거기에 무슨 색의 잉크를 떨어뜨리든 점점 그 색깔을 띠게 된다. 인류는 종교를 바탕으로 예술, 사상, 정치, 문화를 꽃피웠다. 하지만 종교가 인간의 과도한 욕망, 특히 정치와 섞일 때 문제가 생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종교의 힘’을 정치적 선전과 명분의 목적으로 쓰기 때문이다. 마녀사냥과 홀로코스트는 종교의 이름으로 수많은 피를 역사 속에 흐르도록 했다. 종교는 인간이 만든 문명의 가장 깊고 오래된 정수이다. 향수 원액에 코가 마비되듯, 한낱 인간인 우리는 종교에 심취하면 그 광기에 물들 수밖에 없다. 정치뿐만이 아니다. 미의 대한 욕구, 앎에 대한 욕구.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구. 인간이기 때문에 가지는 욕구들로 우리는 종교에 대한 순수한 탐구와 연구를 할 수 없다. 욕구라는 놈은 언제나 아가리를 벌려두고 인간이 걸려든 순간 물어뜯어 버린다.
  현대의 신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아닐까. 컴퓨터가 그 전지전능함을 보이지 않는 곳이 없고 사람들은 점점 컴퓨터에 의지해 컴퓨터 없인 살 수 없게 됐다. 이런 시대에 신의 이름은 0과 1로 된 이진법의 나열이고, 어쩌면11010(2)(GOD=7+15+4=26=11010(2))이 그렇게 찾던 신의 이름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로봇이야말로 충실하게 교리를 해석하고 신의 이름을 추구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닐까. 영화 <인류멸망보고서-천상의 피조물>에서는 로봇 RU-4가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데 이는 꼭 이상적인 종교인의 모습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도 초대형 슈퍼컴퓨터 ‘DEEP TH OUGHT’가 인간의 존재의미를 계산하기 위해 등장한다. 그리고 그녀(성우가 여자였다)는 42라는 심오한 대답을 내려줬다.
  하지만 이러한 발상은 영화나 책 속이기에 가능하다. 현실에서 종교를 모시는 사람들은 인간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절대자에 의한 구원이든, 학문적인 연구 대상으로든 어떠한 이유로도 종교가 없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이 만든 종교에 심취해 자멸하지 않도록 종교의 본질과 인간의 욕망 사이의 조화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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