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같이 집으로 가는 날. 나는 노포행 1호선을 승차하고 좌석에 앉았다. 또 여느 때와 같이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고개를 숙이고는 바닥을 훑었다. 이날 바닥에는 검기보다는 약간은 갈색 빗금으로 더해진, 한 쌍의 날개에 검은 눈동자가 붙어있는 날벌레가 기어 다니고 있었다. 나 외에는 누구도 아직은 그놈을 보지 못한 듯하다. 그놈은 어디를 다쳤는지 하차하는 인파들의 발걸음 아래로 날개와 몸통을 뒤적거리고 꿈틀거린다. 밟혀 죽으러 기는 것일까? 살고자 기는 것일까? 그놈이 그러거나 말거나 모두 고개를 숙이고, 귀에는 이어폰이, 눈은 휴대전화에 꽂혀 있었다. 모두 어디를 쳐다보는지, 눈 맞추는 이 하나 없었다.

  그렇다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눈을 함부로 쳐다보지는 않는다. 일종의 예의를 지킨다는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왜 하필 눈이 문제일까? 물론 친한 친구들과는 대화하는 동안에는 눈을 마주친다.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오히려 눈이 마주치지 않고 휴대전화나 쳐다보면 기분이 나쁠 정도다. 혹시 어쩌면 그 녀석들은 나에게 선택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기분 좋은 눈 맞춤은 선택받은 친구들만 가능한 것일지도. 하지만 그 친구들은 나의 선택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쳤기 때문에 사귀었던 것인가? 나 또한 통과한 것인가? 아무튼, 눈을 마주치지 않는 이유는 불과 얼마 전에 알게 됐다. 수업시간 중 논문의 한 구절이 나의 의문에 해답을 주었다.
  “그들이 지속적인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빈번히 맺을 수 없는 이유는 실망할 경우에 상처받지 않기 위하여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눈은 영혼의 창문이라고 한다. 눈을 서로 바라보면서 나와 너는 깊숙한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이제는 그렇지 못하다.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관계는 애초부터 맺어지지 않는다. 유아적인 나르시시즘. 모두 지레 겁먹고 무관심한 척 시선을 거둔다. 보고는 있지만 마주하지는 못한다. 어떤 때는 쳐다봤다는 이유로 시비가 붙는 경우도 있다. 대개는 술 취하신 분들이다. 그리고 무엇을 감추듯이 일방적으로 고함을 지른다.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의식적으로 자주 눈을 맞춘다면 그만큼 상대방에 대한 믿음이 생겨날 수 있는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 믿음 속에서 자연스럽게 서로가 어떤 사람인지에 관한 대화가 오고 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헛된 바람으로 판명 났다. 내가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꺼려진다 할까. 누가 볼까 얼른 다시 딴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조금 전 마주친 사람이 단지 웃어만 줬다면 나도 그저 웃고 지나갔을 텐데. 두 번 다시는 쳐다보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지하철 특유의 무뚝뚝한 분위기 속에서 다시 벌레를 바라본다. 지켜보지만 지나칠 따름인 나 또한 그다지 벌레에게 어떤 도움을 주지는 않았다. 이제 벌레는 몸이 뒤집혔다. 저런 몸부림으로 지하철 바닥을 기어봤자 먼지와 함께 맨 앞칸까지 직행하거나 청소하는 아줌마의 걸레질에 휩쓸려 덕지덕지 어딘가에 말라붙어버리던가 그렇게 되겠지. 그러는 사이 나는 노포역에서 하차 했다. 그러나 벌레는 다음 역에서 하차하려는지 여전히 버둥거렸다.
   
 박광훈(독어독문 석사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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