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분야의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는 보통 어려움이 따르곤 한다. 가시적인 문제점의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분석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해당 분야를 넘어서 사회구조의 문제로 넘어와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운동권 활동가들이 ‘모든 사회문제는 결국 사회주의 혁명 외에 해결책이 없다’는 말을 농담 삼아 하기도 했을까.
  상대평가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상대평가 확대의 배경은 단순히 대학 안에서 찾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 원인에는 학점 인플레이션이라는 사회적 문제 제기가 있었고, 그 이전에 취직에 유리한 방법을 찾고자 했던 수많은 학생과 대학이 있었다. 또 그 이전에는 고학력을 갖춰도 취직이 되지 않는 노동환경이 있었고, 그 모든 원인의 근본에는 한국 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모순이 있다. 사실 상대평가는 학점을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하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은 수단이다. 더욱이 학생들 사이의 경쟁을 부추겨 학업 성취도를 높일 수 있다는 ‘가능성’도 있다. 경쟁원리가 곧 사회를 떠받치는 이데올로기인 상황에서 대학 따위가 감히 반기를 들 수는 없는 노릇일지도 모른다. 대학에서도 경쟁을 가르쳐야 경쟁사회에 적응할 수 있다는 말이 일리 있게 들리는 이유다.
  어떤 사람들은 절대평가가 원칙적으로 올바르다고 인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뒤에 ‘현실적 문제’로 인해 상대평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그들이 말하는 ‘현실적 문제’는 절대평가의 당위성을 떨어트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느새 학점 인플레이션은 사회 전체가 공유하는 ‘문제’가 됐고 대학은 학점을 적절한 수준으로 통제해야 하는 주체가 됐다. 절대평가가 올바르지만, 절대평가를 할 환경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근본적인 의문을 하나 제기하고 싶다. 상대평가는 정말 학문적 이해를 평가하기에 적절한 수단인가? 상대평가의 학점 통제하는 효과는 인정하지만, 애초에 학점을 통제한다는 것 자체가 올바르냐는 의미다. 어떻게 순위를 매겼을 때 상위 30%에 드는 학생들만이 해당 과목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갖췄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심지어 서울지역 모 사립대학에는 5% 학생들에게 반드시 D학점을 부과하도록 하는 제도가 있다. 대체 모든 수업에서 5% 학생들은 해당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한다고 말할 근거는 무엇인가. 절대다수의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고, 충분히 수업을 이해했을 가능성은 전혀 없는 것인가.
  의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대학이 학점을 통제했을 때, 기업의 인사담당자가 서류를 평가하기 편해지는 것 외에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여전히 취직은 힘들고, 취준생들은 ‘적절하게 통제된 학점’을 대신할 스펙을 찾아 헤맬 것이다. 학생들은 그나마 ‘꽉 채워주는’ 수업을, 상대평가가 적용되지 않는 수업을 찾아다닐 것이다. 단정적으로 말해 상대평가의 확대를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상대평가를 늘리고 성적제도를 고치면 학점 인플레이션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드러나는 증세를 억제한다고 질병 자체가 치료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증세를 억제할 약이 아니라 질병 자체에 대한 치료가 아닐까. 

   

 김민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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