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耳順)의 ‘부대신문’에게 부치며

  언젠가부터 우리학교는 숫자로 존재하고 있다. 한 번 학교 홈페이지를 열어보자. 특정 신문이 평가한 세계대학 평가 순위 및 전국대학 평가 순위, 국내 그룹 임원 배출 순위가 나온다. 그리고 다시 클릭하자 몇몇 학과의 평가가 등장한다. 이는 지난해부터 줄곧 메인화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뿐이다. 우리학교가 지향하는 교육 목표는 무엇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하여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얼마나 멋진 구성원들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사람이 빠진 숫자들, 이것이 우리의 낯뜨거운 민낯이다.
숫자는 산만하게 흩어진 사물들을 정돈해준다. 행간을 추리해야 하는 언어/문자보다 간편하게 세상을 보여주기에 사람들은 숫자를 즐긴다. 여기엔 하나의 판타지가 있다. 즉 숫자는 객관적일 것이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그래서 주관이 갖는 모호한 복수성보다 숫자가 주는 명징한 단일성에 쉽게 이끌린다. 이른바 기준/표준이 그러하다. 하지만 과연 어디가 기준/표준일까?
  사실 숫자로 점철된 세상은 비교/우열의 복마전이다. ‘몇 점’ ‘몇 편’ ‘몇 등’은 나와 다른 누군가와의 비교우위 속에서 자존을 확인하는 기호이다. ‘나’는 자신의 주체적 생명으로 살지 못한 채, 다른 이의 인정과 시선에 기대어 존재한다. 비교가 문제는 아니다. 비교로 세상을 읽어내는 태도가 문제인 것이다. 비교를 통해 숫자로 환원된 ‘사람들’은 이제 육신을 지닌 생명이 아니라 그저 부호로 남았다.
  숫자에 침몰당한 대학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찾기는 쉽지 않다. 숫자교도들은 늘 성과와 사명에 조바심치고 있기 때문이다. 수년에 걸쳐 쓴 논문도 몇 개요, 수많은 이들이 같이 작업한 책도 몇 개며, 십여 년 함께했던 사람이 떠나도 몇 개요, 수십 년 이어온 전통도 몇 개일 뿐이다. 이른바 ‘인간에 대한 예의’란 도덕적 격식 이전에 그간 들인 노동에 대한 인정이요, 함께 작업한 이들에 대한 배려며, 같이 경험한 시간에 대한 추억의 공감이요, 오랜 정성으로 빚어낸 역사에 대한 존중이다. ‘몇 개’란 숫자로 남은 사회는 죽은 이가 누구이든 그저 봉긋한 흙더미에 불과한 공동묘지일 뿐이다.
  화사한 벚나무들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하나의 군락을 이루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주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 똑같은 것은 없다. 모두가 제각각이다. 결코 다른 나무를 의식하며 다투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름답다. 하물며 저들보다 수천, 수만 배 영특하다는 인간들에게 있어서랴! 아름다운 세상을 꿈꾼다면 숫자놀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른바 성과와 사명을 넘어 같이 살고 있는 이들의 숨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부대신문’은 막 이순을 넘겼다. ‘이순’은 귀에 들어오는 모든 소리를 순하게 받아들일 줄 아는 경지이다. 듣기 좋은 소리이든 역겨운 소리이든, 그 어떤 것이든 고맙게 받아들여 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줄 아는 나이이다. 그저 60세가 되었다고 이순은 아니다. 이 경지가 가능하려면 자존의 자생력을 확보해야 한다.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자생력, 이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킬 때만 가능하다. 우리학교 구성원의 인간적 자존은 남이 만들어주지 않는다. 우리 스스로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숫자 너머의 사람을 보기를 기원해본다. 그 선두에 ‘부대신문’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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