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셔-올린 정리가 설명하는 국제무역의 발생 원인

17세에 유럽을 떠난 마르코 폴로는 24년간 중국 전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무역은 교환을 의미하는 말이다. 무(貿)자도 역(易)자도 모두 바꾼다는 뜻이다. 인간이 무역을 할 수 없었다면 인간의 삶은 결코 오늘날처럼 풍요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인간이 수렵·채취 활동에 의존해 삶을 꾸려가던 시절, 개인이나 소집단이 스스로 획득할 수 있는 물적 자원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농경과 무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까지 다들 근근이 살아남았다. 교환무역의 역사는 원시공동체 사회로까지 소급할 수 있지만, 무역은 상황에 따라 거래가 되기도 하고 약탈이 되기도했다. 바이킹(Viking)이 약탈자였는지 무역상인이었는지 구분하기는 쉽지 않지만, 바이킹 한참 전부터 실크로드, 스파이스(향신료)로드, 누들(국수)로드를 따라 원격지 간 무역이 있었다. 국제무역의 역사는 적어도 기록된 역사만큼 길다.

  13세기 초 이탈리아 베니스의 어느 장사꾼 형제가 평소 영업구역보다 멀리 나가게 됐다. 당시 베니스를 포함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는 많은 남자들이 반도 동쪽 근동지방에 가서 상품을 교환해 오는 일종의 보부상 같은 직업에 종사했다. 13세기 초엽은 몽골제국이 형성되던 시기였고 근동지방,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전란이 우발적으로 발생하는 경우가 흔했다. 전란 지역을 통과하게 되면서 귀로가 여의치 않게 된 이 베니스 상인 형제는 우연히 만난 레반트 상인을 따라 엄청난 길을 걸어 원(元)나라 세조(Kublai Kahn)가 있는 대도(大都, 지금의 북경)까지 가게 된다. 유럽인을 처음 본 쿠블라이는 유럽에서 제일 높은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 약간 황당한 질문이지만 이들은 교황이 제일 높은 분이라고 답한다. 교황의 답신을 받아 오라는 쿠블라이의 명을 받고 형제는 1269년 베니스에 돌아오게 된다. 형인 니콜로(Niccolo)가 집을 떠날 때 그의 아내는 임신 중이었다. 니콜로가 집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벌써 죽고 아버지 부재 중 태어난 아들은 친척 손에서 자라 15세가 돼 있었다.
모험가를 꿈꾼 유럽인,
국제무역을 시작하다
  쿠블라이의 서신을 교황에게 겨우 전달한 후 하릴없이 회신을 기다리다 지친 니콜로 형제는 아들을 데리고 1271년 다시 중국으로 가는 긴 여정을 떠난다. 짐작하겠지만 이 17세 청년이 바로 마르코 폴로(Marco Polo)였다. 원 세조의 조정에서 일하며 중국 전역을 여행한 마르코 폴로는 24년 후인 1295년에 베니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가 귀향했을 때 베니스는 제노아(Genoa)와 상업적 이권을 다투는 전쟁 중이었다. 참전한 마르코는 포로로 잡혀 제노아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고달픈 수감 생활을 견디는 수감자들에게 옛날 영화로웠던 시절 얘기는 세월 보내는데 딱 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연 중에서도 마르코의 얘기는 황당무계의 극치였을 것이다. 마르코 폴로의 끝없는 얘기를 듣기 위해 제노아의 명사들이 매일매일 몰려들었고, 수감자 동료들 중에 루스티켈로(Rustichelo)라는 사람이 그의 얘기를 기록한다. 그것이 1300년경에 출간된 유명한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The Travels of Marco Polo)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은 후세 많은 유럽인들의 마음에 바람을 넣었다. 그중 한 사람이 콜롬버스로 알려진 제노아 출신 크리스토발 콜롬보였다. 아시는 대로 ‘지리상의 발견 시대’에 유럽인 모험상인들의 꿈은 아시아에 도달해 유럽에 없거나 부족한 물품을 (약탈 또는 무역을 통해) 조달함으로써 큰 부자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엔 포르투갈인이 말라카해협에서 향신료를 직송해 떼돈을 벌었다. 얼마 후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스페인인들은 금은을 실어 날랐다. 말과 철기, 총기로 무장한 소수의 스페인 군대는 유럽발 세균에 취약한 원주민의 대량 치사를 유발하면서 아즈텍과 잉카의 제국을 정복했다. 금,은을 싹 약탈하고 나자 사금을 채취했지만, 멕시코의 포토시 등지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면서 원주민을 노예 노동으로 채굴에 동원하여 16세기 스페인 왕국은 엄청난 귀금속을 획득하게 된다. 해양 항해술이 빠르게 발전하고 유럽의 정세 변동과 더불어 네델란드인, 영국인들이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를 잇는 무역교통로를 확보하게 되면서, 18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인간을 포획하여 아메리카의 설탕, 면화 농장에 노예로 수출하고 아메리카산 원료를 유럽으로 수입한 후 완제품을 만들어 아메리카 식민지에 다시 수출하는 환대서양 무역패턴이 형성되었다.
오늘날의 생활을
가능케하는 국제분업
  이쯤에서 물어보자. 국가 간에 무역(국제무역)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자명한 대답은 국제무역을 하면 (막대한) 이득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 국제무역의 이득이 발생하는 원인이나 근거는 무엇인가? 국제무역의 이득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한 고전적인 해답은 ‘국제무역이 국가 간 분업에 의한 생산의 특화(전문화)를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국제 분업은 국내 경제활동에서 분업과 마찬가지로 주어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인 용도와 방식으로 국경을 초월하여 활용될 수 있도록 한다.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는 것을 보여주는 유명한 아담 스미스의 핀 공장 이야기가 있지만, 역으로 우리가 현대의 정교한 분업생산과 시장교환 체계를 저버리고 각자의 물질적 욕구를 자급자족을 통해 충족시키려 한다면 모두의 생활 수준이 얼마나 비참해질 것인가를 상상해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원유, 면화, 양모, 철광석 등 기초원자재가 거의 없는 우리나라가 갑자기 수출입 무역을 전혀 할 수 없게 된다면 우리 생활 수준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국제무역과 국제 분업이 가져오는 생산 효율성 향상 효과를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기초원자재나 그 대체물이 국내에서 전혀 생산 불가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산여건이 불리한 이런 상품까지도 국내에서 생산하려고 한다면 효율성이 엄청나게 떨어질 것이다. 국가간에는 기후, 부존자원, 보유한 기술 등 여러 가지 차이가 존재한다. 국가 간 자연적 사회적 차이는 무역 발생의 근거나 원인이 될 수 있다. 기후 여건상 우리나라에서는 바나나를 재배할 수 없다. 타이완은 빨간 사과가 나질 않는다. 1980년대 초반 한국과 타이완은 일정 금액의 바나나와 사과를 서로 수출입하기로 합의했다. 그래서 사과만 먹던 한국인들과 바나나만 먹던 타이완 사람들이 사과도 먹고 바나나도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즉, 무역이 발생하는 원인은 국가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고 무역을 하면 (사과나 바나나만 먹을 때보다) 서로 이득이기 때문이다.
공유의 장, 해법이 되다
  두 개의 재화 A와 B가 있다고 하자. 한국은 두 재화 모두를 생산하는 데 있어서 타이완보다 더 효율적이다. 그런데 양국이 무역을 하면 두 나라가 다 이득을 볼까? 답은 ‘그렇다’ 이다. 이런 아이디어를 19세기 초반까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소위 중상주의(Mercantilism) 시대 유럽 국가들은 자국 상품을 많이 수출해서 그 대금으로 당시 화폐로 쓰던 금, 은 등 귀금속을 긁어모으면 부자나라가 되는 줄 알았다. 영국의 경제학자 리카아도(David Ricardo)가 1817년 ‘정치경제와 조세의 원리’라는 책 제7장에서 ‘비교우위의 원리’를 처음으로 밝히기 전에는 그랬다. 비교우위의 원리는 한 나라가 교역 상대국에 비해 두 재화 모두를 생산하는데 절대적으로 열등하더라도 생산효율의 열등도가 덜한(상대적으로 잘 만드는 또는 비교우위가 있는) 재화의 생산을 늘려서 국내 수요보다 더 많이 생산하여 남는 것을 수출하고 다른 재화를 수입하면 자급자족하는 것보다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교우위의 차이가 클수록 무역의 이익은 더 커지고, 상황이 허용한다면 아예 한 재화만 생산하여 특화함으로써 무역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명제는 그리 자명하진 않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틀림없는 사실이다.
국가 간 생산요소의 차이가 
비교우위를 낳는다
  그러면 재화생산에 있어서 이런 상대적 효율의 차이(즉 비교우위)를 발생시키는 원인은 무엇일까?20세기 초반 헥셔(Eli Heckscher)와 올린(Bertil Ohlin)이란 스웨덴의 경제학자 두 사람은 국가 간 요소 부존(factor endowment)의 차이가 비교우위를 낳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각국은 그 나라에 상대적으로 풍부하게 부존돼 있는 (생산)요소를 집약적으로 사용하는 재화의 생산에 비교우위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후 요소비율이론 또는 헥셔-올린이론(또는 논리상 옳다는 뜻에서 정리)이라 부르는 비교우위의 원천에 대한 이 설득력 있는 가설은 오랫동안 국제무역이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한다. 비교우위의 원리가 놀라운 통찰임은 틀림없지만, 비교우위가 존재하지 않아도 무역이 발생할 수 있는 원인이나 근거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론이 1980년대부터 생겨났다. 신무역이론(new trade theory)이라 불리는 이 이론은 각국이 모든 면에서 서로 동일하다 해도 (비교우위가 존재한다는 말은 국가가 최소한이라도 서로 달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무역과 국제 분업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논증한다. 산업생산의 규모가 커짐에 따라 국제 분업은 규모의 경제(economies of scale)를 활용할 수 있게 만들고 규모의 경제에 의한 생산효율의 향상은 서로에게 이로운 국제무역의 발생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김창수 무역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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