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돌아보면 상당수의 사람들이 후회와 비교의 늪에 빠져 좌절과 절망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다. 비교에 빠진 사람들에게 삶의 즐거움을 어디서 찾는가 하는 물음은 무의미하다. 그들에게 있어 즐거움이란 비교우위에서 비롯된다. ‘내가 누구보다 어떤 능력적인 차원에서 더 월등하다’는 평가와 동시에 주어지는 물질적(소위 속물이라 칭하는), 능력의 대가성의 돈, 명예가 그들에게는 즐거움이다. 많은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현대 사회를 ‘인간성 상실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현대인들이 자본주의와 물질주의가 지배하는 지금, 인간을 누군가의 수단, 시장을 창출하는 기계, 자본을 부르는 존재로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얼마나 똑똑하며 개성이 있고 정의로운지는 효용성, 시장성에 비해 더 이상 중요한 덕목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사회, 인간이 아닌 기계로서의 수단성이 현대인으로서 더 대우받고 필요로 하는 사회가 내가 지금 살아가는 사회라고 느낀다. 적어도 필자가 느끼는 것은 그러하다. 필자가 다니는 조선공학과의 체계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나의 기술과 지식의 전달 능력이지 ‘나’가 아니다. 단순한 지식의 매개체인 것이다. ‘책을 보고 지식을 습득한 존재’는 굳이 내가 아니고 그것이 기계라 하더라도 가능한 일이다.

  이에 맞물려서 우리는 어떻게든 좋은 집단에 들어가고 타인의 좋은 평가를 받기 위해 노력한다. 노력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그렇게 노력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단순히 좋은 집단에 들어가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인가라고. 이런 인간의 가치결정조건이 외부에 의해 결정되는 현상(남에게 평가받고 어느 집단에 속했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외적조건에서 삶의 즐거움과 목표를 설정한다. 예외는 있겠지만 사람의 가치판단의 기준으로 직업의 예를 들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서 의사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부조리한 법을 규탄하고 죄 없는 이를 구원하겠다는 변호사는 별로 없다. 참된 교육을 실천하고 학생들을 바른 삶으로 인도하고자 교사가 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이처럼 우리는 나의 요소, 직업 그 자체적 요소와 가치가 아닌 외적이고 부가적인 요소에서 삶의 목표와 즐거움을 논한다. 연봉의 정도, 사회적 지위 등, 즉 자신의 가치를 외부에 두어 타인에게서의 가치를 평가받으려 하고 이를 삶의 목표로 잡는다.
  이는 생물학적으로 당연하고 어떻게 보면 전혀 이상한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인간’이다. 인간이란 단어에 특별함을 부여하려면 생물학적인 가치와는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이유로 필자는 개인적으로 인간이 짐승과 별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이를 강력히 부정하고 ‘우리는 짐승이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대다수가 하는 행동, 추구하는 바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닌데 말이다. 추구하는 방향의 차이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잘못되었다거나 비인간적이라고 비난하는 바는 아니다. 다만 우리 스스로가 자신을 인간이라고 주장한다면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일까, 생물학적으로 잘사는 것이 진정 인간의 유별난 본성일까, 하는 물음을 품어보면 어떠할까 하는 생각이다.
 
전우경(조선해양공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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