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에 익숙지 못한 청나라 군대와의 항쟁에는 서해의 거센 물살이 방어벽이 되는 강화도가 제격이었다. 이런 강화도를 두고 인조와 조정의 중심세력은 청의 침략 기미를 알아채고도 미적거리다 옹색하게도 남한산성에 진을 쳐야 했다. 전쟁 준비도 없이 명분만 앞세워 ‘오랑캐’ 청을 배척하다 취해진 궁여지책이었다. 강화도로 도망칠 여력도 없었던 것이다. 대신 강화도에는 소현세자와 왕족과 비빈, 그리고 유력 가문의 인사들이 피난을 갔다. 물론 수비 병력도 배치됐다. 강화도 수비의 총책임자는 검찰사 김경징으로 당대 최고실력자 김류의 아들이었다. 검찰사 김경징은 강화도 수비에는 관심도 없이 자신의 가족과 재산만 지키는 데 골몰했다. 백성은 안중에도 없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본격적 침공에 앞서 청나라 군대가 강화도로 밀려오자 김경징은 제 한 몸 살고자 가장 먼저 도망갔다. 이때 소현세자와 왕족, 후비, 신료들이 포로가 되었고, 숱한 양민은 살해되고 물에 빠져 죽고 노예 신세가 되었다. 그 아비 김류도 휘하의 군관을 제 가족과 재물을 보호하는 데 동원했다. 군정을 책임진 자가 그러했다. 전쟁은 하고 말고도 할 것이 없었다. 삼전도에서의 치욕 뒤에도 인조는 김류를 끝까지 비호했다. 도망가기 급급했던 강화도 수비 책임자 김경징도 사면하려 했으나 조정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처형했을 뿐이었다.
  1627년 임진왜란이 지나간 지 30년도 안 돼 정묘호란을 당하고 뒤이어 병자호란이란 대 참변을 맞았다. 한심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요동을 정벌하려고 했고, 명태조 주원장은 이를 의식해 쉼 없이 견제했다. 세종 때만 해도 남쪽의 왜구를 정벌하고 북으로는 4군6진을 설치하며 여진족을 다스렸다. 그러나 중종을 거쳐 인종과 명종, 선조대로 오기까지 나태와 무능, 부패에 빠진 조선의 지배층은 백성을 수탈할 뿐 국방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역사학자 이이화에 따르면 16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실제 동원 가능 병력이 명목상 숫자의 5분의 1밖에 안 되었고, 국고는 반 토막도 남지 않았다. 율곡 이이가 쇄신책이라 할 경장(更張)을 호소하고,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던 것은 이런 현실 인식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 호소에 귀 기울이지 않은 결과가 임진왜란 발발 20일 만에 서울을 빼앗기는 치욕이었다. 임금 선조는 백성에게 욕먹어가며 야밤에 북쪽으로 줄행랑쳤다.
  요새라고 다를까. 천안함 침몰을 두고 북의 소행에 의한 폭침이라는 정부의 발표에 의구심을 표하는 과학자들이 많았다. 필자로서는 그 과학적 의문을 다 이해하기에는 배경지식이 부족하니 뭐라 판단할 수는 없다. 다만 정부 발표를 의심하면 ‘종북’이라고 몰아가는 정치적 딱지 붙이기에는 짜증날 뿐이다. 하지만 사병 출신이지만 분명히 아는 것은 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지만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맥아더의 말이다. 북한 잠수함의 어뢰에 침몰된 것이라면서도 천안함 관련 지휘계통에 있던 상당수의 군 간부들이 진급했다. 징계를 받아야 할 지휘관들이 도리어 진급하고 영전했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최용범 역사전문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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