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김언수 저/2006/문학동네

   뻔뻔하다!소설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능청스러운 ‘구라’가 일품”이라는 은희경 작가의 한줄평이 정확하게 들어맞는 책이다. 

  소설의 제목이자 이야기의 시작인 캐비닛의 이름은 ‘13호 캐비닛’이다. 8~90년대 동사무소나 구청에서 일괄적으로 유행했고, 냄새나는 추리닝이나 바람 빠진 축구공, 기한이 지나버린 자료 등을 아무렇게나 구겨넣고 쾅!닫기에 적당한, 볼품 없고 낡아빠진 캐비닛. 작가는 책의 첫머리에서부터 ‘13호 캐비닛에 대해 우아하고 낭만적인 상상을 떠올리는 짓은 일찌감치 집어치우기를 권한다’며 ‘그런 상상을 한다면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하를 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작가의 경고와 달리, 평범한 캐비닛은 상상 이상의 것들로 가득하다. 손끝에서 은행나무가 자라는 남자, 입 속에서 혀 대신 도마뱀을 키우는 여자, 과거를 지우고 기억을 재구성하는 타임스키퍼, 하나의 육체를 여럿이서 함께 쓰는 다중소속자…. 이들은 ‘징후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의 ‘심토머(Symptomer)’라 불린다. 이들은 변화하는 환경에 더 이상 적응하지 못한 인류가 진화한 형태 같기도 하고 돌연변이 같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새로운 종의 탄생 같기도 하다. 
  주인공인 ‘공대리’는 십 년 동안 매달린 사 법고시에 결국 실패하고 공기업 연구소에 다니는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힘들게 들어간 회사에서 열정을 바쳐 일하려고 하지만 그 곳에는 할 일이 없다. 극도의 무료함을 이기지 못한 그는 아무도 없는 4층 연구실에서 13호 캐비닛을 발견하고, 그 속에 있는 심토머들의 사연을 읽게 된다. 결국 그는 심토머들을 연구하는 ‘권박사’의 연구 보조가 되어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심토머를 처음 접했을 때 공대리가 그랬던 것처럼, 독자도 그들을 그저 돌연변이로 취급해 멀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토머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세상의 아웃사이더들이다. 주위의 사람들에게 배척당해 늘 외로워한다. 심토머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한다.
  “저는 이 폭력적인 이분법의 세계에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정상과 비정상 두 가지만 존재하는 사회. 심토머의 징후들은 현대사회의 병폐가 생물학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현대인이 가진 불안과 강박 따위가 표면으로 드러난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소설은 굉장히 유쾌하지만 굉장히 우울하다. 발랄하고 신비한 이야기 속에서, 어쩐지 슬픈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가짜 이야기이지만, 결국 그 속에서 현실의 우리 모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캐비닛 속 사람들의 사연은, 살아가는 것이 내게만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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