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난 덕에 돈 없어도 재미있게 살 수 있는 방법은 많다” 지난달 보도된 <조선일보>의 기사에 온 나라가 들썩였다. ‘달관 세대가 사는 법’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 차례에 걸쳐 나온 특집기사는 청년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했다. <조선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적게 벌고 적게 쓰지만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세대를 ‘달관 세대’라 칭했다. 이는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우리나라에 적용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심각한 오류가 있다. 일본과 우리의 사회적 조건이 다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한 시간을 일하면 두 끼의 밥을 먹을 수 있지만, 우리는 한 시간을 일해도 겨우 한 끼를 먹을 수 있을까 말까다. 합리적인 최저임금과 국가의 복지정책 등 ‘믿는 구석’이 있는 그들과 우리는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에 처해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고용률이 65%를 돌파했다. 사상 최고의 수치다. 하지만 청년층의 실업률은 오히려 더 높아졌다. 취업 의사와 능력이 있지만 여러 이유로 취업을 포기한 ‘구직단념자’는 50만 명에 육박한다. 이들이 모두 구직 경쟁을 포기하고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생활에 만족하는 달관세대일까?

‘[달관] : 사소한 사물이나 일에 얽매이지 않고 세속을 벗어난 활달한 식견이나 인생관에 이름’ 달관의 사전적 정의다. 묻자. 우리는 달관했나? 이 상황에서 우리는 달관할 수 있나? 불행히도 필자는 기사 속에서 ‘달관 세대’를 찾을 수 없었다. 그저 되는대로 상황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을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사소한 일들에 매여 있고, 세속을 벗어나지도 못했다. 활달한 식견이나 인생관 같은 것은 있을 리 만무하다. 누구도 달관하지 않았다. 달관하지 못했다.

좌절과 눈물로 지내다가 끝내 체념에 이른 청년층에게 ‘달관했다’고 하는 것은 차라리 조롱에 가까워 보인다. <조선일보>의 보도가 달갑지 않은 이유는 청년들의 힘든 현실을 사회구조적 모순이 아닌 개인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청년층에게 ‘수없이 노력했지만 바뀌지 않은 현실에 달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기 보다는 ‘마음만 바꾸면 충분히 즐기며 살 수 있는데 괜히 중장년층 핑계를 대며 불평하지 말라’고 하는 것 같다. 실제로 기사에 달린 댓글에는 ‘너희가 그러니까 안 되는 것이다’라는 아버지 세대의 꾸중이 가득하다. <조선일보>로 대표되는 기성세대는 자신들에 대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구조적 모순을 지적하려고 하면 현실을 모르는 미성숙한 이로 몰린다. 청년들은 자신들과 다른 타자이기에 기성세대로서의 책임을 회피해도 된다는 ‘꼰대’ 의식의 발로인 것이다. 현실을 이 지경까지 만든 자신들의 잘못을 덜고자 하는 발버둥으로 볼 수도 있겠다.

 이예슬 문화부장

내일을 기대할 수도, 희망을 가질 수도 없을 때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취할까. 현실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체념하고 절망한다. ‘저임금·저소득에 맞춰 사는 사람들이 나타났으니 적응하지 못한 사람은 비정상’이라는 그들의 논리에 동의할 수 없다. 이 봄날에, 이 청춘에 달관이 웬 말인가. 청년들의 좌절이 마치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이라도 되는 것인 양포장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 ‘어른’아닌 ‘꼰대’들은 우리에게 달관을 강요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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