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의 ‘함께함’을 담아낸 박수근 화백의 작품을 들여다보다

 

 

 
 

  박수근 사후 50주년을 맞아 박수근의 예술세계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한 미술전문지에서는 그를 과대평가된 작가로 꼽기도 했는데 그 이유로 ‘빨래터 위작시비’가 예술적인 가치를 떨어뜨렸다는 점을 들었다.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사랑해 온 사람들로서는 여간 당혹스럽지 않다. 그러나 ‘보석’에 흙탕물이 튀겼다고 해서 보석이 돌연 ‘잡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사건으로 인해 박수근의 위상이 더욱 확고해지는 결과를 얻었다. 거장의 작품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사람들의 반응은 오락가락하는 듯하다. 우리가 할 일은 반세기 전의 서랍장에 그를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그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라 본다.

 

소박한 현실과 마주한 화가 

 

  박수근은 흔히 ‘국민화가’로 불리어진다. 그가 국민화가로 불리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으나 그중에서도 박수근의 타자에 대한 독특한 시선이 핵심적이다. 박수근의 작품에는 동네 마당에서 공놀이하는 아이들, 담소하는 노인들, 장기 두는 남정네들, 좌판 앞의 여인들, 시장을 오가는 행인들, 광주리를 이고 가는 사람, 동네에서 놀이하는 아이들, 소구와 꽹과리 치는 시골농부, 아이 업은 소녀 등등 다양한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 인물들은 한결 같이 소박한 사람들이다. 박수근은 주위의 인물들을 마치 가족을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으로 정겹게 바라보았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다 같이 못살았던 시절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과의 ‘함께함’은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일관된 특징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나무와 여인>을 보면 중앙의 앙상한 나무를 중심으로 좌측과 우측에는 아이를 업은 여인과 함지를 지고 가는 여인이 등장할 뿐 어떤 친절한 설명을 찾아볼 수 없다. 여인을 표현하였다기보다 ‘헐벗은 나무’, 즉 척박한 환경 속에서 꿈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을 보여주려 했다는 인상이 강하다. 이 그림 속 인물의 시선은 무거운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발길을 옮기는 여인으로 모아진다. 좌측의 여인도 행상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다. 우리는 이 그림에서 박수근의 인물화에 대한 시각을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이 그림을 그리던 무렵에는 화가들이 인물화를 그릴 때 주로 고운 옷차림의 여인이 안락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선호하였다. 그런데 대다수의 서민들이 가난과 굶주림, 기아에 허덕이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런 미화는 별로 실제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가 서민들을 등장시켰던 것은 그림을 추상적인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현실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가 더 멋진 세계를 꿈꾸기에는 현실 상황이 너무 절박했다는 말이다. 그는 관념으로의 도주를 피하는 대신 동시대인과의 마주함을 택하였다.
 
타인에게공감하다
 
  그 역시 힘든 살림을 꾸려가면서도 이타심을 지녔다는 것은 우리로서는 잘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본인이 힘들면 매사에 부정적이게 되고 그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수근은 자신의 처지에 집착하기보다 타인을 이해하고자 하는 공감능력이 풍부했다.
  공감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어떤 위치에 설정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냉정한 이성적 원칙에만 기초하는 사회는 공동의 정서적 교감 안에 우리를 한데 묶어주는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한다. 박수근은 자신의 곤궁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주고받는 교감을 통하여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음을 작품에서 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는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과 더불어 함께 살아가고 있음을 모른다면 (중략) 그는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이다”고 말했다. 이 말은박수근이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뜻을 짐작하게 해준다. 그는 타인을 냉정한 이성으로 파헤쳐야할 대상이 아닌 함께 울고 웃어야할 동료로 바라보았다. 그가 타인에 대한 이해력과 더불어 그런 사람들을 적절한 감정으로 조응하는 능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민감한 공감 능력의 소유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장녀 박인숙씨의 말대로 가난한 사람을 아끼고 측은히 여기는 애정 어린 진실이 아버지 그림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풍부한 공감능력은 그의 단골소재이기도한 일련의 노인 연작에서 두드러진다. 말년의 대표작인 <할아버지와 손자>(1964)를 비롯하여 <나무밑>(1964), <노인>(1961), <시
장의 사람들>(1950년대), <노상풍경>(1962), <노인과 소녀>(1959) 등등. 노인은 <할아버지와 손자>에선 손자를 감싸 안아주는 모습으로, <노인>과 <노인과 소녀>에선 슬픔 또는 회한에 젖어있는 인물로, <나무밑>에선 고목나무 아래에서 관상이나 사주를 봐주는 인물로, <시장의 사람들>과 <노상풍경>에선한담을 나누는 모습으로 각각 그려지고 있다.
  만일 그가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초­­췌한 노인들이 눈에 들어왔을까. 많은 화가들이 노인을 피하는 것은 불편한 현실을 외면하려는 태도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인생의 경주를 거의 다 마친 노인들도 한때는 세상을 다 쥔 듯 펄펄 날아다녔지만 지금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쇠약해져 있다. 누구의 도움을 받아야할 처지에 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노인들도 비슷하다. 그들은 지팡이 없이는 거동할 수 없는 황혼기의 사람으로, 주름살이 깊게 패인 인물들이다. 박수근은 그들에게 눈을 맞추면서 고독하고 쓸쓸한 노경과 삶의 여로를 살펴보았는지 모른다.
  근래에 회자된 ‘갑질’ 논란에 사람들이 공분한 것도 타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가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흰 종이에 싼 금화 한 닢과 검은 종이에 싼 금화 한 닢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사람을 지위와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어떤 색깔의 종이에 싸든 그속에 금화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박수근은 모든 사람 안에는 자신이 살고 있는 영혼과 똑같은 영혼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슬픔과 애환까지 나눴던 박수근
 
  타인과 함께함에는 기쁨의 감정뿐만 아니라 슬픔의 감정도 포함된다. 박수근의 경우 슬픈  감정에 연루된 작품들이 많은 것은 6.25 전쟁 후의 피폐한 사회상이 반영된 그 시대의 심리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넓혀서 생각하면 인간만치 상처받기 쉬운 존재도 없을 것이다. ‘다치기 쉽다’는 뜻의 vulnerability라는 단어는 ‘상처’를 뜻하는 라틴어 vulnus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언제든 상처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박수근 회화의 인물들은 애환에 젖어있을 뿐만 아니라 상처받은 사람들이다. 사회가 혼란하고 곤궁해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에도 주름이 가고 갈등과 다툼이 속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럴 때 박수근이 생각해낸 것은 바로 ‘결속’이고 ‘관계 맺기’였다. 그것은 훈훈한 인간애의 발로인 동시에 희망의 손길이었다.
  깊어지는 관계는 아래로 내려간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박수근이 그들의 애환과 슬픔까지도 이해하려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고작해야 그들의 편에 서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의 처지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는 당신의 고통을 없애줄 수 없습니다. 문제의 해답을 내놓을 수도 없어요. 하지만 이것만은 약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혼자 두지 않고 최대한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 
- Henri J.M.Nouwn 
공감은 이렇듯 고통을 나누어가지며 어느 사람도 소홀이 여김을 받지 않도록 한다.
  미하일 바흐찐(Mikhail Bakhtin)의 시각을 빌려 말한다면, 타자란 나를 완성시켜주는 존재이다. 내 스스로는 나를 쳐다볼 수 없다. 결국 나는 타인을 바라봄으로써 나의 존재가 어떻다는 것을 파악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는 단순한 객체가 아닌 나와는 떼야 뗄 수없는 긴밀한 관계에 놓이게 된다. 박수근 역시 타자에 관한 인식에 매우 적극적이었는데 타자를 객체로 바라본 것이 아니라 슬픔과 애환을 나누는 인격체로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들과 마음을 같이 함으로써 그들과 같은 처지의 자아, 깨어진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했는지 모른다.
<노인과 소녀> 박수근 작/1959

 

<나무와 여인> 박수근 작/1956

 

   <할아버지와 손자> 박수근 작/1964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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