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李斯)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제국을 건설한 진시황의 1등 공신이었다. 이사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승상 자리에도 올랐다. 그런 이사도 젊은 시절에는 보잘것없는 지방의 말단 관리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사는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넣어둔 창고에 살던 쥐가 애처로울 정도로 말라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와 대조적으로 곡물 창고에 사는 쥐는 통통하게 살이 올라 유유자적하게 어슬렁거리는 것을 봤다. 그 순간 이사는 섬광과도 같은 통찰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사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몸을 맡기는 데 따라 인생의 가치와 격이 달라지는 게 아닐까? 본인의 현명함과 무능함의 차이일는지 모르지만, 가난함과 비천함은 대장부의 수치이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리하여 이사는 자신을 키우기 위해 우선 실력을 기르는 곳을 찾았다. 그가 몸을 맡긴 곳은 법가사상과 성악설을 주창한 순자학당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본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순자 학당의 수제자로서 실력을 닦은 초나라 사람 이사는 자신의 재능을 가장 잘 펼칠 수 있는 나라로 진나라를, 몸을 맡길 리더로 진왕 정(政, 진시황)을 선택했다.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기풍의 진나라와 진왕 정이 자신을 뜻을 펼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사는 천하통일의 계책을 진시황에게 전했고, 진나라의 재상으로 등용돼 중국 통일이란 대업에 결정적 공을 세웠다.
  서른을 앞두고 앞길이 잘 보이지 않아 초조와 불안감에 휩싸였던 그 시기, 이사가 두 마리의 쥐를 본 순간의 통찰에 관한 고사는 큰 뜻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했다. 저 넓은 세상에서 자신의 몸 아무 곳이나 함부로 맡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다. 조건의 열악함을 탓하며 의기소침해 있던 주변의 친구들에게도 자주 이 고사를 얘기해주었다. 자신감을 얻었다는 친구도 제법 있었다.
  그런데 나이 오십을 앞두고 다시 보는 이사의 쥐 이야기는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우선 출세주의자 이사의 어두운 뒷모습이다. 외국 출신의 한 인사가 문제를 일으키자 진나라 조정에서는 타국 출신 신료의 축출을 명하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초나라 출신으로 진나라의 고위직에 있었던 이사 역시 그 대상이었다. 위기의 순간 이사는 진시황에게 ‘태산불사토양 하해불택세류(泰山不辭土壤 河海不擇細流), 태산은 한 줌의 흙을 가리지 않고 큰 바다와 강은 작은 물줄기를 가리지 않고 받아들여 큰 산과 바다를 이룰 수 있었다’라며 축객령을 거두라는 상소를 올려 자리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런 이사는 정작 법가의 대가이자 순자학당에서 동문수학한 한비자를 진시황이 중용하려 하자 이를 시기해 한비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한비자 축출의 이유는 그가 한나라의 공자이므로 진나라의 이익에 반하는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축객령에 반대했던 이사 자신의 견해와 정면으로 맞서는 의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이사의 말년은 비참했다. 진시황이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면서 총명한 장자 부소를 후계자로 임명하고 명장인 몽염에게 군권을 맡기라는 유서를 환관 조고에게 맡겼다. 진제국을 몰락으로 이끈 것으로 악명 높은 환관 조고는 승상인 이사를 회유하고 협박해 유서를 조작했다. 장자인 부소와 몽염에게 자결을 명하는 것으로 진시황의 유서를 조작한 것이다. 대신 모자란 둘째 호해를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그 뒤 권력을 농단하던 조고의 모함으로 이사 역시 허리가 잘려지는 요참형에 처해졌고, 3족이 몰살되었다.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염치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는 전직 대통령이라는 자는 자주 쥐에 비유됐다. ‘이익을 보이거든 정의를 생각하라(見利思義)’라는 안중근 의사의 유묵이 더욱 살아 펄떡인다. 앞모습보다 뒷모습에서 사람의 됨됨이가 더 잘 보이는 것이다. 이사가 곳간의 쥐에게서 부귀영화만 보았던 것이 비극이었다.
 최용범 역사작가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