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지금은 미국의 이라크전 개전을 9·11 테러에 대한 정당한 응전으로 받아들일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 같다. 끝도 없는 전쟁. 적의 특성상 애초에 끝을 기대하기 힘든 전쟁. 부시가 공언했던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영화보다 더 스펙터클했던 오사마 빈 라덴의 체포 작전(사실상 사살 작전)이 전 세계 TV로 생중계되고 난 이후에도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 전쟁은 더욱 잔혹하고 뒤틀린 방식으로 어떻게든 현재진행 중이다. 지금 연일 언론 지상에 오르는 IS는, 내 생각에, 당시 미국의 그 결정에 대한 대척점에서 잉태되었다. 인간의 상상력이 가닿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수가 실현된 사례랄까. 
  그렇기에 이 전쟁엔 영웅이 있을 수 없다. 물론 미국의 입장에서는, 명분 없는 전쟁임이 만천하에 폭로되었지만 불행히도 일단 시작했기에 ‘제 2의 베트남전’은 되지 않아야 하는 상황이다. 영웅은 그래서 필요하다. 현실의 지옥도에서 픽션의 히어로를 찾을 수 있다면 ‘지금 저기’의 비극은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전쟁영화의 역설적 본질도 여기에 있다. <람보> 같은 무뇌아 영화가 아닌 한, 현대 전쟁영화 중 반전 메시지를 담지 않은 영화가 있는가. 요컨대 반전영화의 아이러니는 전쟁을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즐길 만한 스펙터클로 재현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하긴 왜 피하겠는가. 참혹한 광경을 즐기는 데서 오는 윤리적 죄책감은 애국심으로 충분히 가릴 수 있는데. 이때 애국심은 영웅-반전-폭력의 스펙터클이라는 이상한 조합을 가장 이상적으로 완성시키는 마법의 열쇠가 된다.
  그런 맥락에서 골수 공화당 지지자로 알려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아메리칸 스나이퍼>에서 전쟁영웅을 스크린으로 불러낸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라크에서 저격수로 복무했던 크리스 카일의 자서전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그가 미군 사상 최다 저격기록을 수립하는 과정을 따른다. 이스트우드는 영화의 관점이 전적으로 미국적인 것으로 편향되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 전장 체험이 주인공의 내면에 미세한 균열을 불러오긴 했으나 명백히 이 영화에는 이 전쟁의 명분에 대한 성찰이 없다. 다만 ‘아버지/ 남편/ 형의 의무’라는 기치 아래, 공격을 받았으니 가족과 조국을 지키기 위해 되받아쳐야 마땅한 가부장의 질서를 과도하게 체화한 카일이라는 인물이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이라크 전에 네 번이나 자진해서 참전하여 이른바 ‘전설’이 된다. 비미국인 관객으로서, 더구나 이 전쟁을 찬성하지 않는 입장에서 <아메리칸 스나이퍼>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영화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마지막 순간 나는 미국인도 아닌 주제에 미국적 애국심에 충만한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뭔가.  
  그렇다면 애국심은 어떻게 생기는가. 최근 우리가 기억하는 애국심 논쟁은 <국제시장>을 둘러싸고 벌어졌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치하한 이 영화의 애국심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부부싸움을 하다가도 국기 하강식에 맞춰 국민의례에는 참여하는 그런 게 ‘나라 사랑’이라니, 차라리 투명한 언어로 ‘유신시대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더라면 덜 우스웠을 것이다. 여하튼 정부 수반이 그러하니 행정부도 그 수준에 맞추어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일 계획을 세웠다 한다. 애국심은 그렇게 해서 생겨나는가? 지난 3·1절에 우리 아파트 사례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 애국심은 그렇게 정책화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고들 말하고 있었다. 

  애국심에는 좌우가 있을 수 없다. 하지만 현 정부의 ‘애국주의’에서는 좌우가 있는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하는, 이데올로기화된 애국심은 집 앞에 국기 하나 내걸 에너지도 되지 못한다. 관점에 동의하지 못하면서도 <아메리칸 스나이퍼>의 애국심에 마음이 흔들린 것은 그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라를 사랑하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지금, 여기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점점 더 희미해져가는 가치가 거기에 있었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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