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한 쌍용자동차 해고자에게 물었다.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싸우는 게 어떻습니까” 그는 답했다. “가족들을 생각해서 싸우는 거예요”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자들은 77일간의 옥쇄파업을 벌였다. 수년간 땀 흘리며 일했던 공장이 며칠 새 피 흘리며 지켜내야 할 곳으로 변했다. 그들은 24시간 경찰과 용역에 둘러싸여 최루액을 맞았다. 공장에 갇혀있던 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사측이 공장 내부의 전기는 물론 물과 식량까지 차단해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찌는 더위에 씻지 못하니 손으로 쓱 문질러도 팔에선 때가 밀려나왔다. 탈진하는 노동자도 속출했으니 몸에서 나는 악취 정도는 불평할 거리도 안 됐다. 파업을 지켜보는 해고자 가족들의 아픔도 만만치 않았다. 한 해고자의 부인은 파업 당시 임신 중이었다. 충격의 여파인지 태어난 아이는 일곱 살이 된 지금도 말을 잘 하지 못한다. 6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날의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두 명의 쌍용자동차 해고자가 다시 쌍용차 공장 굴뚝 위로 올라갔다. 지상에선 더 이상 싸울 힘도, 물러설 곳도 없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간 것이다. 
 
정리해고는 피할 수 있었다
 
  2004년 쌍용자동차는 경영위기로 인해 상하이 차에 인수됐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나아질 줄 알았던 쌍용자동차 경영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그에 반해 자동차 한 대 만드는 기술도 없던 상하이 차는 쌍용자동차의 기술력을 발판삼아 포천 100대 기업으로 진화했다. ­­
  상하이 차는 인수 당시 신차 개발에 힘쓰고 많은 지원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원은 미비했고 출시한 신차들의 판매 실적도 부진했다.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쌍용자동차 사측이 선택한 것은 정리해고였다. 노동자들은 해고를 막기 위해 나섰다. 그들의 퇴직금을 담보로 사측에게 기업회생의 방안과 무급 순환휴직을 제안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제안에도 사측은 결국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전문가들은 사측이 정리해고에 앞서 다른 방안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당시 쌍용차가 지닌 2천억 원 이상의 유휴자산을 매각하면 충분히 기업회생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쌍용자동차는 정리해고를 포함한 회생 절차가 시작되고 나서야 매각을 시도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재정회계담당 장석우 변호사는 “정리해고 이외에도 방법이 많았다”며 “기업 어음 발행이나 대출이 가능한 다른 은행을 찾는 시도가 선행됐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쌍용자동차와 비슷한 시기에 유동성 위기를 겪었던 기아자동차는 정리해고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회생했다. 공장 전체를 매각시킨 후 다시 장기간 임대하는 방법으로 현금을 확보한 것이다. 
 경찰들이 경기도 평택 쌍용자동차 굴뚝 농성장 앞을 지키고 있다
공권력까지 동원된 
시위 과잉 진압
 
  지난 2009년 5월 21일, 쌍용자동차 노조원들은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공장 내에서 파업을 시작했다. 그럼에도 사측은 예정대로 그 해 6월 초 해고를 통보했고 공장을 폐쇄해 파업 노동자들을 가뒀다. 노동자들의 수면을 방해하기 위해 용역들이 꽹과리와 북을 쳤다. 하늘에서는 헬기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식수와 음식도 엄격한 검열을 거쳐야만 반입이 가능했다. 
  시민단체들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이에 우려의 목소리를 계속해서 내고 있던 상황. 파업 저지를 위해 공권력이 투입됐다. 경찰청장은 과잉 진압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지만 당시 경기도지방경찰청 조현오 청장은 무시했다. 무장한 채 동원된 경찰과 용역은 노동자들과 전면 충돌했다. 경찰은 노동자들에게 5만 볼트짜리 테이저건을 쐈고 노동자들도 맞서 새총과 화염병을 던졌다. 전쟁을 방불케 하는 77일간의 파업 시위로 30여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진압 상황은 인권 탄압 역사에 남을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기록됐다. 

쌍용자동차 사태가 남긴 상처들
 
  해고를 통보받은 노동자들은 심리적인 불안에 시달렸다.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고동민 대외협력실장은 “노력했던 대가가 모조리 부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며 “삶의 목표까지 잃어버린 듯했다”고 당시 심경을 전했다. 장기간의 파업으로 노동자들은 예민하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해고의 상처는 각 가정으로 전이되어 가정폭력과 이혼이 늘어났다. 해고자들과 그 가족들이 가진 상처는 쉽게 치료되지 않았다. 해고 단행 이후 26명의 해고자와 그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은 피해자들을 치유하고 있는 와락센터 권지영 센터장은 “과잉 진압의 경험으로 트라우마나 공황장애를 앓는 이들도 많다”며 “파업 당시 헬기가 위협했던 기억 때문에 헬기 소리만 들으면 신경이 곤두서는 분도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파업 이후 경제력을 상실한 해고자들의 고통도 여전하다. 구타로 인해 하반신이 마비된 한 노동자는 병원비 때문에 주거지를 잃기도 했다. 가족 구성원들이 경제력을 잃은 해고자를 떠나는 경우도 빈번했다. 해고자들은 다른 일자리를 수소문해 다녔지만­­ 그들을 고용해주는 곳은 없었다. 사회에서 쌍용자동차 노동자는 이미 ‘불법 파업자’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었다.
 
굴뚝 밑도 살만 한 세상으로
 
  전문가들은 제2의 쌍용자동차 사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부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장석우 변호사는 “정부차원에서 사측의 일방적인 정리해고를 어렵게 만들거나 해고 뒤에도 노동자들의 생계가 유지될 수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용보험이 있지만 기간과 임금 면에서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에 비해 열악한 상태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대법원은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쌍용자동차 정리해고가 적법하다는 판결을 냈다. 그 동안 싸워온 해고자들과 그 과정에서 희생된 26명의 노력이 무색해지는 결과였다. 결국 12월 12일, 금속노동조합 쌍용차지부 이창근 정책기획실장과 김정욱 사무국장은 문제 해결을 위한 최후의 보루로 굴뚝 농성을 택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쌍용차를 잊고 지냈던 시민들이 다시 쌍용차 사태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SNS를 통해 해고 노동자들에게 격려를 보내거나 광화문 앞에서 1인 릴레이 시위를 하는 등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생겨난 것이다. 장석우 변호사는 시민들에게 “쌍용자동차 사태는 노동자 모두에게 일어날 수 있다”며 해고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것을 간절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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