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골목 여행

세상에는 많은 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 골목은 인간과 가장 맞닿아 있는 길이다. 골목은 삶의 현장을 분리시키면서, 동시에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골목은 자신의 옆에서 터를 닦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없이 지켜 보았고, 그렇기에 우리가 잊어버린 것들도 기억하고 있다. 각각의 특색을 지닌 부산의 골목들을 찾아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부산의 과거를 엿보았다.

 

 남항시장 이바지 골목

  영도의 남항시장은 여느 전통시장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다만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시장이어서 그런지 실제 동네 골목 같은 모습이 많이 남아있었다. 길을 헤매며 정처 없이 흘러 다니다 조금 특별한 골목과 마주했다. 이미 지나버린 명절이 다시 코앞에 다가오고 있는 듯 잔치 음식이 화려하게 쌓여있는 곳, 그곳은 ‘이바지 골목’이었다.

  부산 영도의 최대 전통시장인 남항시장은 피난민들의 애환이 서린 곳이다.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시장인 것이다. 남항시장 안에서도 특히 ‘이바지 골목’은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들의 그리움이 잔뜩 담긴 곳이라 할 수 있다. 구수한 잔치음식이 진열된 가판대 뒤로 ‘이바지 골목’ 상인들의 삶의 터전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지금도 명절이면 ‘이바지 골목’은 사람들로 넘쳐난다. ‘이바지 골목’에서 당당히 ‘원조’ 간판을 내걸고 있는 신인범 할아버지는 리어카에서 시작해 36년째 골목을 지켜오고 있다. 그는 “저번 설날에는 이 좁은데서 딸까지 불러가 열 두명이 일해도 모지랬지”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보수동 책방 골목
  국제시장을 지나 대청로 네거리에서 보수동 방면으로 가다 보면 입구부터 서점이 있는 골목을 볼 수 있다. 바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이다. 골목은 사람들로 붐볐다. 다른 지역에서 관광을 하러 온 관광객부터 어린 자녀의 손을 잡고 온 부모의 모습, 데이트 겸 책을 사러 온 연인들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보수동에 헌책방 골목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6·25부터였다. 당시 돈이 없어 먹을 것이 부족했던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서 옷가지나 책들을 가지고 나와 팔기 시작했다. 그중 사람들의 눈에 띈 것이 책이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집에 있던 헌 책을 가지고 나와 팔았다. 학우서점을 62년 째 운영 중인 김여만 사장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이 골목으로 통학을 했는데 그때 책이 잘 팔리는 것을 보고 나도 돈을 벌려고 책방을 열었지”라고 말했다. 70~80년대에 헌책방 골목은 언제나 학생들로 붐볐다. 다섯 군데의 학교가 있었던 보수동에서 학생들은 통학을 하기 위해 책방 골목을 지났다. 온달서점 남명철 사장님은 “신학기가 되면 골목에 발 디딜 틈도 없었지”라며 “등교하는 학생들과 헌 교과서나 참고서를 사기위해 온 학생들로 붐볐다”고 추억했다.
  60~70년 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골목은 점차 쇠퇴했다.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정작 책을 사는 손님은 줄어드는 추세라고. 김여만 사장님은 “언제 이곳이 사라지게 될지 장담 못하지”라며 씁쓸해했다. 
­­범일동 매축지마을 골목
  좌천역 1번 출구에서 내려 터널을 지나면 도착하는 매축지 마을. 마을 밖에는 높은 건물과 자동차가 즐비하지만 이곳은 다르다. 70년대 느낌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시간여행을 하는 듯한 기분까지 느낄 수 있다. 양곡상회에서 잡곡을 파는 아주머니부터 흙장난을 치는 어린 아이들까지 모두가 마을의 정취를 더하고 있다. 
  원래 바다였던 마을은 1932년에 매축이 완료됐다. 그 뒤로 건물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때 이곳의 한 편은 일본군의 말을 보관하는 장소로 쓰였다. 전국에서 모인 징용자를 수용하는 시설을 짓기도 했지만 해방 이후 귀국 동포들의 주거지로 변했다. 6·25 전쟁 때는 부산으로 내려온 피난민들이 판자촌을 이루며 마을은 더욱 북적이게 됐다.
  마을 모습을 배경으로 담기 위해 최근에는 <아저씨> 등 영화 촬영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영화 속 그 모습을 보려는 관광객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김인수 할아버지는 이 마을에서 40년 넘게 살았다. 그는 “내 젊었을 때 여기서 쭉 살았다이가, 근데 여기는 하나도 안 변했다”며 “2년 전부턴가 하나도 안 변한 그기 좋아서 관광하러 많이들 온다”고 했다. 
서동 골목
  서동고개를 오르다 방향을 돌려 골목으로 들어섰다. 길을 따라 올라가자 좌우로 더 좁은 골목들이 나타났다. 세 사람이 나란히 서기도 힘들어 보이는 골목 옆으로, 사람 손이 겨우 들어갈 만큼의 공간만을 남긴 채 붙어선 집들이 있었다. ‘좁다’는 서동에서 낯선 단어가 아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가는 길을 두고, 서동 사람들은 ‘이 동네 고속도로’라고 불렀다.
  지난 1960년대 말, 정부는 부산 영주동과 충무동 일대의 철거민들을 서동으로 이주시켰다. 이들에게 주어진 공간은 대략 15평 내외. ‘크다’와 ‘넓다’는 애초부터 서동과 거리가 먼 단어였다. 집들은 좁고 빽빽하게 지어졌고, 자연스럽게 집과 집 사이의 간격은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크기와 간격은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 재개발 이야기가 나온 지 오래이지만, 아직까진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높은 곳으로 올라갈수록 빈집이 늘어났다. “떠날 사람들은 많이 떠났지. 그래서 빈집도 많고”. 떡방앗간을 하고 있는 A(서동 64) 씨의 말이다. 금사공단의 호황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시절도 이제는 서동이 간직한 추억이 됐다. 금사공단의 쇠퇴는 서동의 쇠퇴로 이어졌다. 아직 서동에 남은 사람들은 독거노인이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경우가 많다. 살던 곳에서 밀려난 사람들로 시작된 서동은, 아직도 밀려난 사람들을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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