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날에 서울에 있는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역귀성이고 기차표를 예매해 놓아서 편하게 갈 수 있었다. 할아버지 댁은 고려대학교 근처 안암동인데, 서울에서 크게 변하지 않는 동네 중 하나다. 내 어릴 적 기억과 별반 달라지지 않은 곳. 그래서 더 반갑다.
  나는 서울에 살 때 이사를 많이 다녔다. 새로운 동네가 처음에는 낯설었지만 곧 그곳에 정이 들었고 그 때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래서대학에 입학한 다음 마음먹고 추억이 깃든 곳들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내 생각과 달리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두어 곳은 건물은 그대로였지만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었고, 한 곳은 아예 집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어서 안타까웠다.
  반면 안암동은 공기와 냄새조차도 옛날 그대로인 것 같았다. 신설동역에서 내려서 대광고등학교를 끼고 돌면 보문천을 만나고, 거기서 다리를 건너 어릴 때부터 왔다 갔다 했던 길들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할아버지 댁이 나온다. 게다가 나를 사랑해주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계시니 그곳에 가면 무장해제가 된다. 
  그런데 부산으로 돌아와 잠을 푹 자고 잘 쉬었는데도 피로가 몰려왔다. 서울 지리를 전혀 모르는 건 아니지만 어디 갈 때마다 인터넷 지도를 한 번 봐야 안심이 되고, 맞게 가는 건지 한 번 두리번거려야 하는 데서 오는 어색함과 긴장감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인 서울이 반갑기는 하지만 부산이 편하다. 
  부산에 전혀 연고가 없는데 벌써 부산에 산 지 10년이다. 여행 온 듯 살기 시작해서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성장한 부산을 나는 좋아한다. 태종대 쪽에 큰 배들이 바다에 정박해 있는 모습이 여전히 신기하고, 구시가지인 보수동, 광복동, 남포동을 돌아다니기를 즐긴다. 여름이면 지하철역에서부터 느껴지는 서늘한 해운대의 바람이 좋고, 봄에 해운대 백사장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지역에서 친구가 놀러 오거나 하면 평소에 가보지 못한 부산의 이곳저곳을 탐방하는 것도 좋아한다. 
  이번에 모처럼 서울에 가지 않았다면 서울과 부산에 대한 애착을 알 수 있었을까?단지 떠났을 뿐인데 여행이 나 자신을 다시 바라보는데 영향을 준 것이다. 또 내가 인생과 마주치는 순간의 순수함을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새롭고 낯선 것은 사람을 긴장시키고 때로 두렵게도 만들지만 그 첫 경험이 현재의 나를 형성하는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첫 느낌들이 서려있는 내가 살았던 곳들에 대한 향수를 간직한다. 그리고 미래에 부딪히게 될 새로운 느낌들이 나를 충만하게 할 거라고 생각한다. 

  사랑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는 것 같다. 어떤 곳을 그리워하는 감정은 그곳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 뒤였기 때문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기억도 필요하다. 따라서 고향에 애착이 가는 것은 반드시 돌아갈 곳, 변하지 않았으면 하는 곳이어서가 아니라 내가 처음 느꼈던 경험이 있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직 알지 못하는 곳을 그리워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안무가 피나 바우쉬의 말처럼 집에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오지만, 또 즐거운 마음으로 집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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