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몸에 대해 ‘인간 경험의 거대한 영역’이라고 말했다. 몸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삶을 개념화한 것이면서도 인간의 존재 자체를 논할 수 있는 가장 집단적인 개념이기도 하다. 건국대학교 몸문화연구소는 이러한 몸을 직시한다. 몸이 어떻게 사회를 움직이고, 또 사회는 어떻게 몸을 움직이는지를 주목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몸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마음을 다루고, 인간과 사회를 다룬다. 연구소의 중심에는 김종갑 소장이 있다. 예민한 자의식 때문에 몸에 관심을 갖게 된 그는 몸과 관련된 사회·문화 현상을 분석하고 해설하는 삶을 살고 있다. 올해는 <생각, 의식의 소음>이라는 책을 내 일상에서 마주하는 사소한 인문학에 대해 논하기도 했다. 학생들에게는 ‘현대사회와 몸’이라는 강의를 통해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지난 4일, ‘몸문화연구소’라는 현판이 더 눈에 띄는 그의 연구실에서 그가 생각하는 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 2013년 몸문화연구소에서 펴낸 <포르노 이슈>에 대한 질문을 던졌더니 대뜸 “포르노는 좀 보세요?”라고 물어 기자를 당황하게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터뷰는 한 시간 가량 이어졌다.

한 마디, 한 마디를 힘주어 말하는 그의 태도에서 연구에 대한 자부심과 신념을 느낄 수 있었다.

 

   
 

△연구소의 이름으로 ‘몸문화’는 참 생소하다.

몸문화란 도대체 무엇인가 '몸문화'라고 하면 그게 뭔지 감이 잘 잡히지 않거든요. 그래서 한때는 '술문화냐', '밤 문화냐'와 같은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몸문화연구소는 일단 몸에 대해 연구를 해요. 그런데 몸은 철학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고 과학적으로 할 수 있고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거든요. 사회에서 몸이 어떤 식으로 표현되고 소통되고, 기호화되고 자본화되는가. 우리는 그런 문제를 연구하고 있어요. 사회현상으로서의 몸. 그게 주된 관심사죠.

 

△몸문화연구소가 다루는 소재는 단지 몸과 관련된 것으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훨씬 더 넓은 범위까지 포함하는 것 같다. 기준이 있나

사실 우리 연구소에서는 어떤 주제도 다룰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것에 접근하는 시각 혹은 방법론이 '몸의 관점'인거죠. 가령 권태라면 몸이 늘어지는 거잖아요. 폭력이라는 것은 몸에 어떤 충격이 와서 거기에 고통이 생기는 현상이고, 가족은 몸이 공동으로 기거하는 공간이잖아요. 그래서 굳이 몸만 앞으로 내놓지 않더라도 다양한 주제를 다룰 수 있고, 범위를 좁힐 필요는 없다고 생각을 했어요.

매년 연말에 워크샵을 해요. 학문적인 주제도 중요하지만 대중과 보다 넓게 소통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요즘 가장 화두가 되는 주제를 발굴해 내고 있어요. 그래서 폭력, 권태, 가족 등 사회적 이슈가 되는 아젠다를 다루고 있죠. 그리고 매년 총서와 기획서를 내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어요. 우리로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는 전문가에게 의뢰를 해요. 모두가 연구원일 필요는 없고, 우리 연구소에서 주관하되 외부에 있는 사람들도 같이 참여할 수 있어요.

 

△영어영문학과 교수다. 몸문화연구소의 연구는 철학에 더 가까워 보이는데, 몸문화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가 있나

개인적인 이유로는 몸이 그렇게 건강하지 못했어요. 어릴 때부터 비염이 굉장히 심했어요. 가령 다리를 접질리면 다리에 통증이 오면서 땅에 제대로 발을 딛을 수 없잖아요. 그럴 때 ‘아,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다리로 걷는구나’라고 깨달으면서 몸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거든요. 비염은 숨 쉬는 게 의식이 돼요. 숨이 가쁘기도 하고, 뇌에 산소 공급이 안 되니까 답답하기도 하고, 코 점막도 굉장히 건조해져요. 내 몸을 의식하지 않을 도리가 없어요. 건강한 사람들은 몸이 없는 듯이 살아요. 그런데 불편한 사람들, 건강하지 않는 사람들은 몸의 눈치를 보면서 살아가죠. 이렇게 몸에 대한 자의식이 더 예민했던 것 같아요.

또 다른 이유는 영문학이에요. 그 중 전공이 비평이론인데, 비평이론은 문학과 철학이 접하는 지점에 있어요. 문학과 철학을 공동으로 탐구하죠. 미국의 경우 중요한 철학 이론들을 가장 먼저 가져오는 곳이 철학과가 아니라 영어영문학과에요. 철학적으로많이 열려있다는 거죠. 또 대중문화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지, 왜 그것이 우리를 열광하도록 만드는지를 탐구하는 문화연구도 한 영역이에요. 중요한 연구 주제가 섹슈얼리티, 몸이에요. 영문학과 내에 이렇게 몸에 대한 관심, 통로가 열려있는 것이죠.

 

△연구원들과 공동으로 집필한 <포르노 이슈>에서 포르노에서는 포르노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드러난다.

포르노가 ‘실재로의 추구’라고 주장한 바 있는데 포르노가 성적인 욕망의 표현이고, 넘치는 욕망의 출구라고 이야기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성적인 호기심이거든요. 욕망은 차올랐을 때 방출해버리면 사라져요. 그런데 호기심은 채울 도리가 없거든요. 저는 남자니까 여자로 이야기를 할게요. 남자에게 여자는 가장 절실한 욕망의 대상이잖아요. 여자를 몰라요. 비밀에 싸여있기 때문에 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잖아요. 마치 문틈으로 실내를 들여다보듯이 보고 싶은 욕구, 눈의 욕망이거든요. 여자의 나체를 보면 욕구가 채워질 것 같잖아요? 채워지지 않아요. 아름다운 여자를 봤지만 이 여자는 내가 찾던 진짜 여자가 아닌 것 같애. 그래서 다른 포르노를 봐요. 그래서 포르노 시장이 엄청나게 클 수가 있는 거예요. 계속해서 '이건 진짜가 아니야'라고 외치죠.

결국 양파 껍질을 벗기는 것과 같은 현상이 일어나요. 포르노는 결국 나중에 보여줄 거다 보여줘요. 그런데 ‘뭔가 모른다’라는 호기심은 더욱 왕성해지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극소 카메라를 생식기 안으로 들이밀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주기까지 하잖아요. 생식기의 근육이나 살, 핏줄 이런 것들이 여자는 아니거든요. 계속해서 알고자 하는 욕망이 여자를 해체시켜버리는 지점까지 도달한다는 것이죠. 진짜 여자를 알고 싶어 하는 강박관념과 실재에 대한 집착이 포르노를 만들어내요. 사실 실재는 없고 보이는 게 다잖아요. 양파 껍질을 하나 벗기든 두 개 벗기든.

 

   
 

 

△그렇다면 ‘실재로의 추구’는 호기심에서 발원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르노를 허용해야 된다는 말인가

 

실재를 알기 위한 호기심이지만,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포르노 산업이 만들어낸 환상, 허구거든요. 그 허구를 통해서 여자가 무엇인지 알려고 해요. 결국 여자에 대해서 더 모르게 되는 것이죠. 여자에 대해 알려고 보지만, 사실 그러한 욕망의 결과는 욕망의 해체죠. 따라서 포르노를 통해서 진실한 여자에게 접근할 수 없는 것이고, 오히려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돼버려요.

 

또 한 가지는 모든 것이 세팅되어 있다는 것. 포르노에 있는 여성은 남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포즈를 취하거나 연출을 하잖아요.

 

섹스의 천국이 바로 포르노에요. 모든 여자들이 섹스하길 바라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그래서 마치 ‘포르노토피아’ 같은 환상을 더욱 자극해요. 포르노를 본 사람 모두가 성범죄를 저지르진 않죠. 문제는 포르노를 보면서 얻은 이미지를 가지고 진짜 여자들을 만나게 되면 세팅이 되어있는 장면을 갖고 접근하기 때문에 더욱 관계를 맺기 어려워져요. 그렇기 때문에 포르노 중독인 사람들은 진짜 여자를 보면 성적인 욕망을 못 느껴요. 진짜 여자는 너무 시시해 보이는 거야. 포르노의 여자가 진짜 여자 같고. 이렇게 포르노와 현실의 도치 현상이 나타나죠. 좋은 관계를 만들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야금야금 좀먹어 들어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포르노의 범람을 막을 길은 없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요. 청소년기에 이러한 포르노를 통해서 이성을 알게 되면, 훗날 지속적인 영향을 끼쳐요. 누구나 다 보니까 안 보는 것처럼 유세 떨지 말고 포르노에 대해서 강의하고 토론도 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해지는 방법 같아요.

 

 

 

△최근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진 것 같다. <마녀사냥>과 같은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고, 섹스 칼럼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많은데 비판할 점은 없나

 

<마녀사냥> 한두 번 봤어요. 재밌더라고. 소재를 너무 과장하지 않고 담백하게 취급하는 것 같고요. 그럼에도 모든 섹스에 대한 이야기는 환상을 조장하거든요. ‘굉장하게 했다더라’, ‘굉장한 여자더라’ 등. 그래서 내가 하는 섹스는 진짜 섹스가 아닌 듯한 느낌이 들게 만들거든요. 그런데 진짜 섹스가 어디 있어요. 모든 게 다 진짜지. 섹스칼럼 쓰는 사람들은 진짜 아름다운 섹스가 어떤 것인지 모델을 제시하잖아요. 독자는 자기검열을 하게 될 텐데, 그러면 내가 하는 섹스는 불완전 혹은 가짜 섹스라는 식의 생각을 갖게 되거든요. 그런 부작용이 생길 수 있어요.

 

그럼에도 장점은 뭐냐면 섹스도 테크닉이거든요. 동물이 교미하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에요, 문화권마다 다르고요. 문화적으로 섹스가 무엇인지 다르게 규정되고, 그건 우리가 배울 수 있다는 거잖아요. 우리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마녀사냥>같은 프로그램이나 섹스칼럼니스트들이 아름다운 섹스를 위해 어떻게 노력해야 된다는 식의 팁을 던지는 것이 굉장히 좋은 것 같아요. 그런데 부작용은 내가 누리고 있는 섹스를 불완전한 것으로 치부하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런 칼럼을 쓰고 이야기할 때 굉장히 조심해야 돼요.

 

 

 

△<생각, 의식의 소음>에서 ‘생각을 많이 할수록 행복하다는 명제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그렇다면 당신이 정의하는 행복은 무엇이고, 생각은 왜 행복을 방해하는 것인가

 

생각이라는 것은 어떤 외부의 충격에 대한 반응이거든요. 지나가다 낙엽을 밟았는데 십 년 전 일이 생각나고, 사고를 당했던 것이 생각나는 것처럼. 일단 일어난 생각에는 관성의 법칙이 있어요. 생각하기 시작하면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또 다른 생각을 불러일으키면서 생각의 연쇄반응이 일어나요. 부풀리고 과장하려는 속성도 있어요. 가령 누군가 나에게 싫은 말을 했을 때 ‘별꼴이네’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 있다 보면 ‘천하의 죽일 놈!’이 돼버리거든요. 그리고 생각의 무게에 허덕여요. 결국 세상을 바라다볼 때 생각에 절은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생각이 판유리처럼 대상과 나 사이를 막아서거든요. 중요한 건 이럴 때 생각은 언제나 나와 관계된 생각이에요. ‘감히 나한테?’처럼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메여있거든요. 그러면서 사물이나 사건과 직접적인 관계를 잃어버려요. 그 생각의 짐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고, 생각하기 보다는 ‘지각’을 해야 돼요. 느끼고, 만지고, 감각을 열어놓고.

 

내가 주인공이 아닌 진리를 향한 생각은 훌륭한 거예요. 가령 ‘삶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자’라고 했을 때 여기에 나 김종갑은 없어요. 나와는 무관하게 의식을 살포시 얹어놓는 것이죠. 수도승이 기도할 때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이 헛된 생각이에요. 그냥 생각이 아니라 잡생각, 생각의 잡음들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에요. 우리가 하는 생각을 스스로 돌이켜보면 생각의 90% 이상은 다 잡생각이고, 소음이에요. 엄청 많이 하는데 나와 상관없는 진리를 향한 생각은 안 하죠. 송사리 생각은 많은데 고래 같은 생각은 없어요.

 

 

 

△연구소 목표가 ‘타자화된 몸의 주체화, 소외된 몸의 회복’이다. 어떤 점에서 몸이타자화되고 소외됐다고 말하는 것인가

 

행복이라는 것은 가장 쾌적한 상태라고 생각해요. 엄청난 쾌감이 솟구치는 게 아니라 평온하고 쾌적한 상태. 그렇기 때문에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관대해져요. 행복한 사람이 많을수록 사회는 아름다워지고 배려하는 문화가 싹트죠. 그런데 요즘 사람들을 보면 나와 내 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정보가 있어요. 성형 광고, 식스팩 만들라는 헬스클럽 광고, 등등. 게다가 보이는 사람들은 다 멋있고 예쁘죠. 그러면서 내가 몸과 무척 멀어져요.

 

대표적인 증세가 저울 보는 거잖아요. 몸무게를 달아보면서 정해진 미용비율에 맞추는거죠. 내가 나를 바라다보면서 관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점점 나로부터 더 멀어져요. 이건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다른 사람 앞에 나를 세워놓는 것이거든요. 마치 배우가 되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몸으로 바뀌는 것이 타자화되는 것이고, 소외되는 것이죠.

 

현대 사회는 어떤 식으로든지 나를 길들이고 규범화해요. 그런데 사람마다 하고 싶은 것이 있잖아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투자할 수 있거든요. 내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귀를 열고 내 몸의 소리를 들어야 돼요. 그리고 이 몸을 가지고 내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삶의 방향을 정하는 거죠.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 자기 몸을 관리해야 하는 것이 타자화되고 소외된 몸을 주체화하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죠.

 

 

 

△스스로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나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네요. 그렇게 생각해요. ‘고향을 떠나면 고향이 고향인줄 안다’고들 하잖아요. 처음 고향을 떠났을 때는 고향 사람들이 별로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돌아올 때는 그리워지는 거예요. 촌스럽고, 궁상맞고, 남루한 고향을 긍정하는 것이거든요. 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잖아요. 키가 작고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거나, 건강하거나 혹은 질병이 있거나. 그런데 현대 사회에서는 키높이 구두를 신거나, 성형하는 등 자신을 계속 부정하게 만들어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를 긍정해야 되요. 고향을 긍정하게 되는 것처럼, 어쩌면 우리의 삶은 주어진 자기 자신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나도 따지고 보면 고쳐야 될 부분이 되게 많죠. 그런데 그런 것에 대해서 아쉬움이나 열등감을 느끼지 않거든요. 이 모습이 나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을 자신의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나를 바라보는 자세와 관점을 바꿔야 되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미용 사업이 규정하는 것에 등을 돌릴 필요가 있어요.

 

 

 

△역사를 되짚어봤을 때 우리는 육체를 원시적, 야만적으로 생각했다. 또한 ‘감정’에 휘둘릴 때 나약한 인간으로 취급받았다. 따라서 정신과 이성적인 판단을 중요시하게 된 것 같다

 

사실 저는 몸이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몸은 마음으로 보일 수도 있고, 육체로도 보일 수 있고 관점에 따라 다양해져요. 보다 고차원적인 것을 추구하게 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해 재정립할 필요가 있거든요. 사실 우리는 몸인데, 몸이 아니라 영혼이라고 생각해요. 몸은 소멸하는 거잖아요. 생로병사라는 시간적 흐름에 묶여있고 굉장히 제한적이죠. 이러한 것으로 보다 더 높은 가치를, 영혼 불멸한 무언가를 추구하거든요. 그러한 욕망이 육체와 마음이 따로 존재한다는 이분법적인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이죠. 따라서 내가 몸이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 보다 고차원적인 문화를 싹 틔울 수가 있어요. 그런 점에 있어서 이원론은 모든 문화의 전제조건인 것 같아요. ‘나는 몸이다’라고 생각하면 소멸하는 몸 이상의 아름다운 가치를 추구하기 어려워지거든요. 따라서 인간이 인간 이상이 되고자 하는 이분법적인 전략이 바로 몸과 마음의 이원론이라고 생각해요.

 

그러한 문화가 2,000년 이상 서양사회를 지배했잖아요. 기독교에서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때문에 몸을 원죄라고 보죠. 일을 해야 되고 질병을 앓는 존재. 그리고 근대사회에 접어들면서 ‘몸은 감정적으로 충동적인 반면 마음은 이성적, 합리적이다’라는 식으로 대립시키거든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것을 이성으로 컨트롤 하는 것은 더욱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가능성을 열어주거든요. 그러다보면 몸에 소홀해져서 몸과 관련된 것을 부정하게 되요.

 

하지만 우리는 몸이에요. 이분법적 이론은 인간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거쳐야 되는 필수적인 과정이었어요. 하지만 그런 전략이 몸으로부터 소외되는 반갑지 않은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이제 어떻게 몸이 되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될 때가 됐다는 거죠.

 

 

 

△알 거 다 아는 나이, 하지만 무엇이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20대다. 우리는 몸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

 

이성에 대해 관심이 굉장히 높아지는 시기가 20대잖아요. 구애가 이뤄지고 결혼을 하기도 하고요. 지상과제는 어떻게 여자, 남자로서 매력적으로 보일 것인가. 성공하기 위해서 관련 책이나 잡지를 보면서 배우기도 하고.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굉장히 노력해요. 그런데 참 다양한 방법으로 남성과 여성이 될 수 있는데, 대중매체에서는 길이 하나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거든요. 그러면 자신이 누구인지도 발견하기 전에 대중문화의 검열에 걸려서 몸을 바꾸고 교정해요. 누구든지 자신의 방식으로 멋있어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만약 어떠한 단점을 가지고 있어도 자신의 장점으로 만들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참, 이런 이야기하면 너무 평범해져버려요. 꼭 같이 나오는 것이 외모 지상주의거든요. 역사상 외모가 중요하지 않았던 때는 한 번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외모를 관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아름다운 여자, 남자에 대한 규정이 있기 때문에 획일화되고 말아요. 그런 획일화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그것을 20대 때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요. 나름대로 아름다워지고, 나의 아름다움과 멋에 내 인격이 반영되도록 만드는 것. 행동하는 것이 멋있으면 못생겨도 멋있게보여요. ‘하는 짓이 예쁘다’라고들 하죠. 그렇게 새롭게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요. 보이는 몸이 아니라 하는 짓, 하는 몸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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