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 문학전문기자

   ‘한국 문학, 경박하다’ <한겨레> 최재봉 문학전문기자가 부서에서 처음 쓴 기사다. 시작부터 강렬했다. 20년이 넘게 문학전문기자로 활동한 최 기자. 그는 깊이 있는 통찰과 날카로운 비판, 절제된 문체로 문학을 지면에 녹여낸다. 스스로를 “문학작품과 독자 사이의 매개”라 표현하는 최재봉 기자. 그의 첫인상은 의외였다.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난 최 기자는, 그가 써내려가는 ‘무겁고 매서운’ 글과는 달리 왜소한 체구에 온화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커피 한 잔 하실래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기자를 얼빠지게 만든 최재봉 기자. 문학과 언론 사이에서 굳건히, 그리고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봤다.

 

△처음 기자가 될 당시 ‘문학전문기자’라는 직책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문학을 담당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입사한 것이 아닐 텐데, 어떻게 문학전문기자가 됐나요?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어요. 석사과정도 거쳤고, 1년 동안 시간강사로 활동했죠. 학교를 다니며 내내 ‘공부를 계속 하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어요. 그런데 문득 회의가 들더라고요. 87년도, 한창 사회적으로 뜨거울 때였죠. 이 시대에 학문을 하는 게 한가하지 않은가하는 생각. 또 교수와 학생, 교수들 사이, 교수와 재단, 이런 질서들에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했죠. 그러면서 ‘학문이 아니면 무엇이 있을까’ 생각을 했더니 곧바로 언론이 떠올랐죠. 마침 그 무렵 <한겨레신문> 창간 안내가 나오고 기자를 채용하고 있었죠. 해직기자들이 주축이 돼 만드는 새로운 신문이다 보니, 기존의 신문과 다를 것 같고. 당시 주변 동료들은 노동자로 취업해서 동시에 운동도 할 만큼 급진적이었어요. 나도 그나마 신문을 통해 사회적 변혁을 위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거죠.

  그렇게 공채 1기로 입사했어요. 처음 지망 부서 의견 수렴에 국제부와 문화부를 써냈죠. 사회부를 잠시 거친 후 국제부에서 3년 반 정도를 보냈고, 92년 5월쯤 문화부에 배치 받아 9월부터 문학담당을 하게 됐어요. 여러 가지 분야가 있지만 전공이 영어영문학이기도 하고 어렸을 때부터 문학에 관심이 많았기에 기왕이면 문학담당을 맡고 싶다고 생각했죠. 그 기회가 왔고.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고 애정을 보일 수 있는 게 문학이다 싶어서 계속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는데, 이를 회사에서 배려하고 받아줬어요. 그러다보니 전문기자가 된 건데, 사실 전문기자라는 표현보다는 한 분야에 집중한 기자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오랫동안 깊이 파고드는 기자가 워낙 없다보니, 그에 대해 문제라 생각하기도 했고 취재원들도 아쉬워했죠. 그래서 20년이 넘도록 문학기자를 하고 있죠. 다른 분야로 가기에는 이미 늦었어요(웃음).

 

△그만큼 관심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해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언제부터 문학에 애정을 가지셨나요?

  제가 어릴 때에는 문학이 자연스러웠어요. 처음 활자를 접할 때부터 글이 좋았고, 더구나 시골에서 읽을거리가 없다보니 구할 수 있는 문학은 모두 읽었어요. 그러면서 도서관도 생기고 책 볼 기회도 많아지면서 더 열심히 보게 됐고. 또 이를 흉내 내서 쓰기도 시작했죠. 초등학교 4-5학년 때부터 시작한 것 같아요. 재미를 붙이고 대학시절까지 계속 습작을 써냈는데, 스스로 창작에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문학을 가까이 하고 싶은데, 오히려 평론이 더 적성에 맞지 않을까. 어쩌다 문학기자를 하다 보니 그때 생각했던 그림과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고 생각해요. 평론과는 다르지만 작품에 대해 글을 쓰는 건 비슷하니까요.

 

△하지만 문학과 언론은 형태 자체가 다르지 않나요? 언론이 정보와 사실을 전달하는 매체잖아요. 물론 근대 초기 신문에서부터 문학작품을 연재했고, 비교적 최근까지도 이어졌죠. 신춘문예도 계속 유지되고 있고. 하지만 일선에서 활동하며, 근본적으로 언론이 문학을 다루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가져본 적은 없으신가요?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신문과 문학은 동업자라고 생각해요.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문인들도 많고. 역사적으로 많은 문인들이 기자로 활동하기도 했고요. 장편소설은 물론 평론, 단편 등도 신문을 통해 발표된 경우가 많았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성격은 다소 다르지만 글을 쓰며 먹고 살고, 이를 통해 사회적인 논의를 한다는 것. 그런 점에서 활자·문화 공동운명체 같은 느낌? 동지애랄까. 요즘은 신문이 인터넷, 모바일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야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오고 실제로도 그런 움직임이 있어요. 하지만 활자 인쇄 매체라는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어요, 둘 다. 외형의 차이가 있을 순 있어도 함께하는 관계라 생각해요.

 

△신문에서 문학을 다루다보면 조심스러울 때가 있을 것 같아요. 서평이 곧 칼럼이잖아요. <한겨레>와 최 기자님에게 비판을 하던 한 독자가 생각나는데,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한 김훈 작가에 대한 기사에 두 개의 지면을 할애했다고. 회사의 논조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그렇다고 할 수도 있죠. <한겨레>가 지향하는 바, 표방하는 바가 있고. 그런 것이 은연중에 반영이 돼있겠죠. 하지만 동시에 내가 생각하는 세계관이랄까, 생각 이런 것이 신문의 논조와 크게 차이나지 않아요. 굳이 ‘신문의 논조에 맞추자’고 의식하지 않아도 그런 기사가 나와요. 처음 문학담당을 했을 때와 문학관의 변화가 없지는 않지만, 이는 우리 신문이 겪어온 변화라고 볼 수 있어요. 신문의 논조고 바뀌어왔으니까요.

  독자의 반응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죠. 일리가 없지는 않다고 봐요. 말씀하셨듯이 김훈 작가를 예로 들자면, 보수적인 사람인 게 확실하고 그 성향이 작품에 드러나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을 위해 문학을 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그 저변에 나름의 세계관이 있고 그것이 새겨들을만하다고 생각해요. 예술로서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것저것 따졌을 때 읽을 만한 작품, 기사로 다룰만한 작가이기에 다룬 거죠. 단순히 ‘꼴보수다’ 이렇게만 볼 수 있는 작가는 아니에요. 너무 일도양단 식으로 갈라서 볼 문제는 아니라 생각합니다.

 

△<한겨레> 책 섹션에 대한 비판도 있지만 그만큼 인지도도 높은데요. 출판업계나 독자들로부터 평이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2010년 출판업계 종사자를 대상으로 한 인지도 조사에서 <한겨레>와 최재봉 기자님이 1순위로 꼽혔습니다. 무엇 덕분일까요?

  일단 분량이 가장 많아요. 매주 금요일자 신문 일곱 면을 할애하거든요. 그만큼 비중을 둔 신문사는 없어요. 예전에는 우리 이상으로 분량을 할애했던 경우가 있는데 조금씩 줄어들었죠. <한겨레>는 그런 경향과 상관없이 오히려 분량을 늘린 적도 있었어요. 그런 양적인 부분에서 좋은 평을 받지 않았을까요?

  또 이런 이야기는 쑥스럽지만, 기사의 질도 좋은 평을 받은 이유라 생각해요. <한겨레> 기자들이 굉장히 신경 써서 책 섹션을 만들거든요. 최대한 많은 시간을 들여 책을 읽죠. 전문가들은 바로 알 수 있어요. 이 기자가 책을 제대로 읽고 기사를 쓴 건지,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얼마나 정확한지. 이런 것들이 쌓여 ‘객관적이고 깊이 있는 기사를 쓴다’는 인식이 자리 잡았다고 봐요. 신문사 내부에서도 새로운 기자들이 올 때 그런 부분을 의식하고 열심히들 할 정도니까요.

  제가 좋은 평을 받을 수 있었던 건, 워낙 오래했기 때문 아닐까요? 다른 신문사 기자들은 부서를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데 전 그렇지 않으니까요. 이름을 기억할 만하면 바뀌는, 그런게 아니니까 ‘프리미엄’이 붙은 것 같아요. 그 부분이 제일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 <한겨레>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고 하셨는데 그만큼 힘든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취미를 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힘든 점이 많죠. 얼마 전 문인들과 술 마시는 자리가 있었는데, 어떤 평론가가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평론을 하려니 순수한 책읽기의 즐거움을 잃어버렸다고. 비슷한 것 같아요. 책을 읽을 때 ‘어떻게 기사를 쓸까’ 궁리하며 읽게 되거든요. 부담 없이 작품 속에 빠져드는 독서, 그게 잘 되지 않죠. 기자들은 주로 신간, 그리고 한국문학 위주로 기사를 작성해야 하니까요. 내가 읽고 싶은 책이 있어도 그럴 시간이 없어요. 계속 누적만 되죠. 오히려 그런 책들이 더욱 영양가 있는 책들일 텐데, 상대적으로 허술한 책을 기사 때문에 읽어야 하는 시간은 괴롭죠. 문학기자를 그만두게 되면 읽고 싶은 책만 자유롭게 읽으리라 바라고 있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요(웃음).

 

△그런 힘든 일을 20년 넘게 해오고 계신데요. 이제 문학을 담당하는 후배기자들도 많지 않나요? 다른 신문사 역시 전문기자들이 많이 생겼고. 문학기자들에게 필요한 자질이 무엇일까요?

  문학에 대한 애정은 당연한 얘기고요. 문학기자 뿐만 아니라 기자들에게 글 솜씨를 많이 요구하는 추세인 것 같아요. 신문기사가 딱딱하고 건조한 것이 기본이지만, 그것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개성과 창의성을 요구하는 추세로 신문이 바뀌고 있어요. 문학담당이라면 다른 분야보다 더욱 중요한 부분이고요. 문학이 문장과 글의 예술이니까. 글 쓰는 능력, 가장 필요한 부분 같아요. 그만큼 책을 많이 읽기도 해야겠죠.

 

△최 기자님의 문체에서도 그런 노력이 묻어나있는 것 같습니다. 독자로서 최 기자님의 글은 건조함과 유려함 사이, 그 중간을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해요. 일전에 고은 시인도 최 기자님을 두고 “자신만의 문체를 이루었으며, 신문기자이기에 앞서 문단의 일부”라고 평한 바 있는데요

  저는 사실 제가 글 솜씨가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확하게 쓰려는 노력은 항상 하지만. 감성적인 문장을 쓸 수 있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창작에 재능이 없는 거죠. 제가 추구하는 것도 그런 문체보다는 튀지 않으면서도 정확하고 깊이 있는 기사. 그런 기사가 쓸 만한 또 써야할 기사라 생각해요. 문체는 그리 의식하지 않아요. 특별히 ‘어떤 문체를 구사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그냥 다루는 작품에 대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멋 부리지 않고 정확하게 쓰려고 해요. 예전에는 기사에서 비판적인 표현을 많이 사용했어요. 비판 없는 저널리즘, 단순 중계보도, 허황된 끼워주기 식 칭찬. 이에 문제의식을 가졌었거든요. 요즘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죠. 문제가 생기는 게 피곤하기도 하고, 다들 힘들게 문학하는데 가능하면 격려를 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죠. 이런 생각들이 제 문체를 만들어낸 게 아닐까요? 잔재주를 부리지 못하는 대신 뼈대와 핵심을 챙기는, 그런 스타일의 기사.

 

△마음이 약해지신 건가요(웃음)? 세태 변화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은데요. ‘문학의 위기’라는 말을 흔히들 사용하잖아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실제로 책 판매부수도 줄어들었고, 관심을 끌만한 다른 매체도 많이 생겼죠. 예전에는 문학이 필수라는 분위기가 강했는데, 요즘에는 문학 활자를 덜 접하게 되고. 대신 대중음악이나 웹툰 등 문학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들이 생긴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흐름이죠, 세상은 항상 변하니까. 그렇다고 문학의 시효가 다했나, 이런 비관적인 생각은 하지 않아요. 문학과 활자에 대한 믿음은 여전해요. 해야 할 역할이 있잖아요. 그 근거로, 문학을 하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많아졌어요. 전문 문인들 외에 자기의 업을 가진 일반인들이 글을 쓰는 경우가 늘어났죠. 출판이 쉬워진 탓도 있겠지만 자기만의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 더 크다고 생각해요. 이런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봤는데, 결국 문학이 가진 매력 아닐까요? 자신을 표현하고 그러면서 되돌아보는 게 문학행위잖아요. 물론 문학 서적을 사서 보는 사람보다 쓰는 사람이 더욱 많은 이 현상이 아이러니하고 괴탄할만하긴 한데, 거꾸로 생각하면 사보지 않는 것만큼 쓰지도 않는 것보다는 나은 상황 아닌가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 본질은 계속 이어져나갈 거라고.

 

△문학에 대한 믿음. 최 기자님의 삶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전반적으로 문학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잖아요. 그렇기에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 같은데요. 최재봉 기자님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요?

  문학이 뭘까요? 내가 문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정의 내리기가 어렵네요. 문학 주변에 있는 사람이기에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독자와 문학 사이에서 양쪽을 매개하는 제 입장에서는, 좀 거창하긴 한데 삶과 세계, 우주, 이런 것에 대한 ‘창’이 아닐까 생각해요. 제가 문학담당이 된 후 제일 처음 쓴 기사의 제목이 ‘한국 문학, 경박하다’에요. 당시 저는 문학의 무거움과 진지함, 사회적 문제의식, 정치성. 이것을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한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소설들이 눈에 밟히더라고요. 마치 하루키같은 가벼운, 댄디하다고도 표현하는 그런 문체로 세상의 표면을 스쳐지나가는 느낌이랄까. 세계관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그런 세태를 비판했었죠.

  저는 최인훈 작가를 굉장히 좋아해요. 그 지성과 지적인 깊이, 이런 것들이 그분 소설에는 있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 작가들은 감성적인 것에는 참 능한데, 시야를 넓히고 그 인간과 세계, 우주의 본질까지 들여다보는 고민이 부족한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아쉬운 점이죠. 관념적인 것과도 조금은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치적 방향성이나 인간적 윤리, 이게 전혀 없어요. 이를 포함한 지성을 작가들이 갖춰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들이 세계를 표현하면 독자들은 프리즘을 통해 이를 들여다보는 것. 그런 것이 진정한 문학이 아닌가 싶어요.

 

△최재봉 기자님은 세계를 표현하는, 그런 작가가 될 생각이 없으신가요? 언론인 출신의 문인들도 굉장히 많잖아요. 학창시절 습작을 계속 썼다고 하셨는데 문학작품을 써낼 생각은 없으신가요?

  문학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글을 써보고 싶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출판업계에도 그런 분들이 많고요. 저도 막연하게나마 그런 생각이 없지는 않아요. 어릴 적에 농담 삼아 ‘마흔 즘에 쓰겠다’고 얘기하고 다녔는데, 이미 쉰 살을 넘어버렸네요(웃음). 지금은 그런 생각이에요. 오랫동안 문학담당기자를 하면서 작품을 많이 접하다 보니, 그 많은 작품들 속에 비슷한 걸 하나 얹어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하는. 다른 사람이 쓰지 않는, 꼭 있어야할 작품이라면 쓰겠지만 아니라면 굳이 쓰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 은퇴하고 나이가 더 들고 나면 새로운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뭐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하하.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