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가장 걸출한 이야기꾼 폴 오스터가 쓴 『오기 렌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웨인 왕 감독의 <스모크>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폴 오스터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작가 폴이 어느 날 담배 가게 아저씨 오기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다가 아연해진다. 오기의 사진첩에는 똑같은 사진들이 수천 장 있었던 것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십 년에 걸쳐 찍은 사진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뉴욕 3번가 출근길을 찍은 그 사진들을 건성으로 휙휙 넘기던 폴이 우리가 보기엔 여느 사진과 다르지 않은 한장의 사진에서 숨을 멈춘다. 거기엔 몇 해 전 세상을 떠난 아내의 마지막 모습이 우연히 잡혀 영원히 박제되어 있다. 그 사진에 울음을 터트리던 폴을 보며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났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다. 그냥 청춘의 대책 없는 감상이었는지, 얼핏 다 똑같아 보이는 우리 모두의 일상이 그들 각자에게 실로 엄청난 드라마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던 것인지.

유튜브에는 그 비슷한, (평범한 이들의) ‘영화’가 여럿 올라와 있다. 이를테면 몇 년간 자신의 모습을 매일 한 장씩 찍어 그 사진들을 이어 붙여 한 편의 거대한 클로즈업 드라마로 완성한 이도 있고, 같은 방식으로 미술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예술가도 있다. 놀라운 집념의 일기. 그걸 누가 영화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면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보이후드>는 생각만큼 그리 새로운 기획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영화는 딱히 이야기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을 만치 한 소년의 평범한 일상들로 채워져 있었는데 이걸 마치 스릴러 영화 마냥 숨죽이며 지켜본 이유는 우리가 보는 그것이 그 소년의 실제 성장 과정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의 서스펜스는 이런 것이었다. 6살 꼬마가 어른들이 해보라고 해서 엉겁결에 한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런데 그 영화를 1년 뒤에 잠깐 찍고,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뭐 그런 식으로 대학에 들어가는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계속 찍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소년기’를 고스란히 스크린으로 옮겨 낸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을 때 그 소년의 내면에서 벌어질 문제를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만약 그 꼬마가 어느 순간 영화 찍기를 거부한다면?

카메라로 중계되는 십대의 삶이라니, 누군가에게는 환상적일 이 작업이 누군가에게는 지옥 같은 일일 수도 있겠다. 물론 <보이후드>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하지만 감독이 연출하기 불가능한 것(이를테면 급변하는 외모와 그보다 더 큰 감정적 진폭)이 영화에 미친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아 보인다. 허구의 인물 메이슨과 그를 연기한 소년 엘라가 경계 없이 뒤섞여 소년기의 변증법적 인상을 포착해냈다고나 할까. 영화는 마치 12년 치의 스냅사진 마냥 생생하고 아득하며 찰나적이고 여백이 많다. 결과적으로 <보이후드>는 특정한 ‘그들’의 ‘소년기’를 초월한 영화가 되었다. 우리는 이 소년에게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본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전부인 것, 평범해 보이지만 실은 위대한 것, 잔혹하지만 아직 끝내기엔 이른 것, 우울하지만 결국은 아름답다고 말해야 할, 우리들의 성장기.

<보이후드>를 두고 국내외 언론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모든 시간들”(뉴욕 타임즈), “희귀하고 독창적인 서사시”(월 스트리트 저널), “올해 최고의 영화”(롤링 스톤즈), “최근 10년 내 가장 위대한 영화”(가디언), 또 “영화사에 기록되어 마땅한 기념비적인 영화”(씨네21)라며 극찬 릴레이를 이어가는 중이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그저 이렇게 말하고 싶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희귀하고 독창적이며 무엇보다 최고로 위대한 기념비적인 영화는 당신(우리) 자신의 생이라고. 리처드 링클레이터 가 그 긴 시간동안 우리에게 내내 전하고 싶었던 얘기는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우리가, 영화다.

   
 강소원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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