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시내에 있는 서점에서 특별한 ‘그림책’ 한 권을 샀다. 동시인·동화작가·그림작가 65명이 모여서 쓰고 그린 <세월호 이야기>다. 어린이문학에 해당하는 책이기는 하지만, 집에 있는 딸아이에게 주려고 산 것은 아니다. 동시대의 어린이문학 작가는 세월호 사건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으며, 또 ‘재난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지 궁금해서 구입한 책이다. 이른바, 세월호 문학의 아동판. 이 책을 구입하면 ‘2,400원’을‘ 세월호 참사 추모사업에 기부’할 수도 있다고하니 일석이조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이런 ‘관찰자적 태도’는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 몇 페이지를 읽지도 않았는데 가슴이 먹먹해서 책장을 넘기기가 힘들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 가는 단원고 학생들만이 탄 것이 아니라, 내가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또래의 ‘대학생들’도 있었고, 또 ‘제주에서 감귤 농사를 지으며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부모님을 따라 오빠와 두 손 잡고 배에 오른 다섯 살 어린 소녀’도 있었다. 딸애와 같은 나이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 마주하는 문장과 문장을 손쉽게 과거로 흘려보내고 지나치기가 어렵다. 장주식이 쓰고 서종훈이 그린 <남의 일일까요?>는 나의 이런 태도를 질책하고 있는 것 같아서 무척 부끄럽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모두 세월호 사건의 목격자이다. ‘제3자’가 아니라 ‘당사자’라는 뜻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세월호가 침몰해가는 모습을 마치 스펙타클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시청하고 공유하였다. 카메라의 시선을 따라 ‘가장 안전한 자리’에서 아이들의 부고를 전송받았다. 이것은 일종의 ‘간접 연루’다. 그렇기에, 세월호 사건은 희생자나 피해자, 혹은 그것을 수습하고자 하는 해운사나 정치권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세월호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 힘을 보태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동화작가 임정자는 <세월호 이야기>의 머리말에서, 이 사건을 “기록물로 남겨 우리사회가 안전한 곳이 되게 하는 데 힘을 보태”기 위해서 ‘한뼘그림책’을 기획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문자 보존 행위가 아니다. 문학은 일상의 망각과 싸우며 새로운 미래의 감수성을 창안해가는 ‘다시 쓰기’ 활동이다. 그래서 ‘세월호 문학’은 목격담인 동시에 증언록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에서 문학의 독서 행위 자체가 우리 삶을 영구 혁명으로 이끄는 실천적 수행이라고 이야기하였다. 물론 이때의 ‘문학’은 매우 포괄적인 개념으로 통상적인 용법의 문학 장르를 넘어서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문학의 개념이나 정의가 아니라, 지배질서가 구축하거나 주입하는 정보와 감성의 코드를 전복하고 어긋날 수 있는 감수성의 양식이 문학이라는 점이다. 그것은 경우에 따라 시나 소설이 되기도 하고, 철학서나 사회과학 서적이 되기도 하며, 영화나 만화가 되기도 한다. 동화와 동시 같은 어린이문학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아동판 세월호 문학인 <세월호 이야기>는 기억의 마모와 퇴화에 맞서는 힘겨운 ‘기억투쟁’의 최전선에 놓여 있다. 이 책은 세월호 유가족을 응원하기 위해 어린이문학 작가들이 ‘거리 현수막’에 게시한 동시, 동화, 그림을 책으로 묶은 것이다. 보수적 시각에서 보면, 이것은 ‘프로파간다’적인 행위이며, 동화나 동시가 추구하는 ‘순수(?)’한 동심주의에서 벗어난 이적 행위이다. 하지만 세상을 아름답게만 그리거나, 규격화된 도덕률을 교훈적으로 전달하는 것만이 ‘동심(童心)’이 아니다. 루소가 <에밀>에서 어린시절에 우언(寓言)이나 우화(寓話)를 읽게 하는 것에 반대하였던 사실을 떠올려보자. 어린이문학에서 요구하는 동심주의는 우리 사회를 통해 규정되고 부여되는 엄정한 도덕률을 학습하고 주입받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어떤 대가도 없이 ‘진실’을 추구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과 용기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세월호 이야기>는 동심주의의 임계와 철책을 넘어 진실의 자리를 모색하는 새로운 동심(童心)의 모험이 아니겠는가. 시인 정유경은 이렇게 묻는다. “진실을 말해줄 사람들은 어디 갔나요?”

   
 박형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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