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소설 부문에 응모한 작품은 모두 스물두 편이다. 예년에 비해 월등히 많은 편 수에 우선 놀라고 반가웠으나, 읽는 내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문학이 구시대적 퇴물로 내쳐지고 위태로운 실존을 감당한 지 오래되었으나, 그럼에도 이 가난하고 미력한 문학의 위의(威儀)를 믿는 온건한 젊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더없이 미덥고 고마운 일이었다. 허나 생이 한창인 청춘들이 너나없이 신산한 생존을 토로하는 이야기들 속에서, 읽는 우리들은 줄곧 비감(悲感)했고 하릴없이 아프고 불편했다. 분노할 기력조차 소진하고 우울과 무기력을 호소하는 이 시대 젊음들이 지난 시절 이상이나 박태원의 권태를 앓던 인물들, 예컨대 ‘박제된 천재’「( 날개」)나 ‘소설가 구보’「(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와 무수히 겹치면서, 역사는 진보한다는 공리(公理)가 단지 허방의 공리(空理)에 불과함을 절망적으로 확인하기도 했다. 재난 같은 현실을 살고 있는 젊음들에게 고작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은 치유를 빙자해 현실을 날조하는 한낱 기만적 언사에 지나지 않으리라. 그러니 값싸고 손쉬운 위안을 구하지 않고, 외려 시류(時流)를 거스르며 더 치열하게 폐허의 현실을 응시하려는 스물두 명의 불온한 젊음들과 만나면서, 우리는 비감 중에 역력한 희망을 읽었고, 해서 못내 안도하기도 했다.

아마도 좋은 소설이란 현실을 의심하고 세상을 다시 상상하려는 이 같은 날선 문제 의식과, 종래의 묵은 이야기를 과감히 탈피하려는 서사적 모험이 동반될 때 온전히 담보될 터이다. 스물두 편의 응모작들 중에서 이러한 가능성을 잠재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나, 이를 제대로 구현한 경우는 사실 그리 많지 않았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 중, 소설에 대한 근원적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의 종말」은 주제의 중압에 짓눌린 탓인지 관념이 성한 데 비해 서사가 빈약했고, 권태로운 일상을 사는 청춘들을 조명한 「권태」나 「개인정보」는 시대의 병리를 꿰뚫는 통찰은 뛰어났으나, 이를 지극히 개인적 차원으로 환원해버리거나「( 권태」), 비판의 날카로움을 잃고 밋밋한 서사로 귀결되는 한계를 노정했다「( 개인정보」). 꿈을 접고 속악한 현실을 좇으려는 두 친구의 위기를 그린「우리가 좋아했던 것」은 인물 교차적 서술을 시도하는 등 참신함이 엿보였으나, 첨예했던 갈등이 쉽게 미봉되고 교훈적 이야기로 마무리되는 아쉬움을 남겼다. 이들에 비해 ‘사유의 깊이’와 ‘서사의 밀도’ 모두 일정한 성취를 보여준 작품은 「철학도가 사과주스를 사 마시러 간다는 것」, 「검은 건반을 위한 연주곡」두 편이었다. 비틀린 자본지상주의 시대를 풍자하는 「철학도가 사과주스를 사 마시러 간다는 것」은 선명한 주제의식, 신선한 이야기, 문장의 힘 모두 나무랄 데 없는 재기 넘치는 작품이었다. 문학 역시 자본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나날의 위기를 살기에 시대에 대한 철학도의 환멸과 우울에 더 깊이 공감하기도 했다. 다만, 상징의 의미를 보다 섬세히 풀어내고 주제를 결집해야 할 종반부가 약한 것이 아쉬웠다. 초등학생 소녀의 시선으로 한국의 다문화 현실을 포착한 「검은 건반을 위한 연주곡」은 서사적 안정감과 주제의 깊이를 겸비한 좋은 작품이다. 장애를 지닌 한국인 아버지와 가출한 베트남인 어머니를 둔 소녀의 녹록찮은 현실을 핍진하게 그려 뭉클했고, 소녀의 시선에 끝까지 맞춤해 한국사회의 차별을 읽어내는 기량 역시 돋보였다. 인물들은 모두 생생히 살아 있었고 소설 속 현실의 풍경은 추상이 아니라 역력한 구체였다. 심사위원들은 오랜 숙고와 논의 끝에 「검은 건반을 위한 연주곡」을 당선작으로, 「철학도가 사과주스를 사 마시러 간다는 것」을 가작으로 최종 결정했다. 선정된 이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를 보내며, 이번 수상이 부디 좋은 소설가로 성장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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