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우등생들은 강의 때 받아 적은 교수의 ‘말’을 그대로 시험지에 옮겨 적어야 A 학점을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강의에서는 교수의 ‘말’이 가장 중요하고, 예습은 거의 하지 않고 복습만 열심히 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대표 대학이 대학교육의 근본적인 목표가 되어야 할 ‘ 비판적창의적 사고력’ 함양보다 ‘수용적 사고력’을 조장한다는 최근의 한 연구가 밝힌 내용이다. 80년대 초의 시 한 구절과 다르지 않다.

“‘아니다 아니다’라고 읽으니 /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 ‘그렇다 그렇다!’ 읽으니 /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쓸쓸한 우리들의 책 읽기여/우리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그런데 왜 이 우등생들은 <하급반 교과서>를 따라 읽게 되었는가? 청년실업률이 심각한 사회, 취업이 지고지순의 가치가 되어버린 우리 사회에서 학생은 취업을 위해 학점에 매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학점에 도움되지 않는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위한 공부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교수는 어떤가? 조직적으로 강제되는 각종 업적과 성과에 대한 평가, 특히 강의보다 연구를, 그것도 연구의 분량을 강조하는 평가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 자연스레 교육 바깥으로 눈을 돌릴 것이며, 당연히 학생의 질문을 귀찮아하고, 비판적이거나 창의적인 태도를 쉬 무시하게 될 것이다.

대학과 사회 또한 마찬가지이다. 초·중·고 모두 입시교육에 초점을 둘 수밖에 없는 제도는 물론이며, 근본적인 교육을 위한 제대로 된 정책의 부재는 대학이 ‘비판적 창의적 사고력’을 길러주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자본논리에 매몰된 언론은 대학의 본질과 기능을 원천적으로 무시한 지표, 또한 현실에 맞지 않는 지표들로 대학을 한줄서기 시키고, 대학은 이 평가에 그야말로 목을 매달고 있다. 이런 대학평가를 최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주체가 대학생들이라는 사실이 그나마 희망이 되는 지금 우리 대학교육의 현실이다.

교육의 근본을 생각해야 한다. 이미 16세기의 몽테뉴는 ‘교육이란 판단력을 길러주는 것’이라는 전제 아래, ‘암기한 지식은 지식이 아니며’, ‘좋은 선생이란 가득 찬 머리의 소유자보다 잘 짜인 머리의 소유자’라 했다. 20세기의 철인 화이트헤드 또한 ‘이것저것 많이 알기만 하는 박학다식은 백해무익’이라 했다. 따라읽는 <하급반 교과서>를 비판하고 ‘비판적·창의적 사고력’을 강조하였다.

21세기에도 바뀐 것은 없다. 하버드대학은 2007년 학부 교육과정 개편보고서에서 대학교육의 목표를 선언했다. “추정된 사실을 동요시키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들며, 현상들 밑에 그리고 그 배후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폭로하고, 젊은이들의 방향 감각을 혼란시켜 그들이 다시 방향을 잡을 수 있는 길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수, 대학, 사회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새겨보아야 할 말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의문이 든다. 지금 우리 부산대학교는 어떤가? 젊은이를 ‘도와주고’ 있는가? 그만의 목소리로 상급반교과서를 스스로 읽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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