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와 실존주의

 

 필자는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녔는데, 당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큰 인기를 모으고 있었다. 필자도 그 인기에 편승해서 책을 샀는데-사실 이책은 한 때의 베스트셀러로 기억될 수준 이상을 훨씬 넘어서는 뛰어난 걸작이다- 동아리 선배가 우연히 제목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말. “제목이 희한하네. 철 지난 실존주의 느낌도 나고”

 

사르트르 혐오?

2005년은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프랑스에서는 자국 출신의 위대한 철학가이자 문학가,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던 그를 추모하는 각종 학술 행사 등이 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존이 본질을 선행하는지, 본질이 실존을 선행하는지 잘 모르겠지만”이라는 한 철학가의 가벼운 빈정거림이 섞인 코멘트, 사르트르 혐오(sartrophobie)라고 명명할 정도의 “사르트르는 여전히 착각하고 있는가?”라는 렉스프레스 지의 기사를 포함한 당시의 소소한 사건들은 한 때 프랑스의 지성계를 대표하던 인물과 사상이 여전히 사랑받고 있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듯하다. 현재 벨기에의 한 극장에서는 사르트르의 대표적 희곡 <더럽혀진 손>이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상연 중이다. 한 평론에서는 “사르트르는 더 이상유행이 아니며 희곡의 설정도 구식이지만 연출가가 참신함을 불어넣었다”라고 언급함으로서 사르트르와 실존주의에 대한 현 대중의 태도를 함께 전하고 있다.

정말 실존주의는 철 지난 사상인가? 사르트르의 철학서와 문학서 역시 앞으로 고전의 가치만 지닌 채 연구가와 학생들의 손에서만 남아있을 것인가? 사실, 전 세계의 모습은 사르트르가 활동했던 당시와는 많이 달라졌다. 특히 인터넷으로 인해 더욱 가속화된 사이버 문화는 인류에게 정체성이나 존재에 대한 새로운 사고와 개념을 선사하게 되었다. 현재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민족주의의 부상, 유럽 연합의 탄생과 문제점 등도 사르트르가 생존했을 때 제기되었던 국제적 문제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필자가 감히 추측하건데, 그의 사상과 활동이 없었다면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의 모습은 현재와 같이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사르트르의 사상은 바로 서구 문명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는 원리와 개념에 대한 의문, 그리고 반항과 도전으로 요약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와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프랑스어로 ‘existentialisme’의 번역이다. 즉 ‘존재(existence)’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용어이다. 왜 우리나라에서 이 용어가 존재주의 가 아닌 난해하게 느껴지는 ‘실존주의’로 정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아마 일제 강점기 때 대부분의 서구 문화가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일본에서 사용하는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생긴 현상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현재 실제로 있는 존재 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복잡한 어휘를 택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그 결과로 실존주의는 관련 강의 시간에 본격적으로 내용도 설명되기 전에 많은 학생들을 겁먹게 만드는 대표적인 사조가 되었다 한편, 이 단어에서 ‘isme’은 1위를 의미하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실존주의는 “실존이 중심이 되는, 우선이 되는 주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실존이 본질을 선행한다”는 사르트르의 표현은 바로 이 실존주의의 중심사상을 요약해주고 있다고 할 것이다. 즉 고정된 특질이 존재에 앞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르트르에 의해 실존주의가 20세기 중반 서구를 매혹했던 사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원류는 사르트르보다 100년 전에 활동했던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당시 이성이나 과학을 통한 해결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윤리나 진리의 문제에 있어서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가였다. 그는 철학가임에도 불구하고 개념을 밝히거나 정의하는 것을 싫어하고 일기와 같이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를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이러한 방식은 참된 실재로 돌아가기를 원했던 실존주의자들의 태도를 잘 반영해주는 방식이었기에, 사르트르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소설, 희곡, 에세이를 통해 사상서만큼이나 자신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사르트르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사상가는 다름 아닌 하이데거이다. 그는 현상의 존재로서 인간 실존을 탐구했는데, <존재와 시간>은 바로 이에 대한 결과물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크게 경도된 사르트르는 이 저서의 제목을 약간 차용하여 <존재와 무>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철학서를 발표하였다.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 저서라고 할 만한 이 책은 제대로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이 손꼽을 정도의 상태로 베스트셀러가 된 드문 일례가 되었다.

 

실존주의에 입문하는 이들을 또 두렵게 하는 ‘즉자(en soi), ‘대자(pour soi) 개념은 실존주의를 설명해주는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다. 즉자(프랑스어에서 en은 상태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다)가 존재 이유, 의미도 없는 것, 즉 사물이라고 한다면 대자(프랑스어에서 pour는 지향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는 우리가 조종하는 의식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실존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것은 바로 인간이고, 각자가 창조하는 세계는 저마다 꾀하는 목적에 의해 달라진다. 그러므로 세계는 대중이 믿고 있듯이 모두에게 가치있고 준엄한 실재가 아니라 개인과 민족과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문제는 ‘나’를 기준으로 볼 때, 타인들도 대자가 있으며 자기 관점에서 세계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관점에서 나는 주체성을 잃고 사물과 같은 즉자로 귀결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르트르의 희곡 <출구없음>에서 갸르생은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이다. “지옥, 그것은 타인들이다”

이와 같은 특징들은 실존주의가 왜 그토록 전후에 서구에서 폭발적인 유행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추측하게 해준다. 세계대전 이후로 피폐해진 유럽에서, 신, 즉 절대적 가치를 상실하고 인간성의 존엄함, 심지어는 인간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진 이들, 절대성이라는 구심점을 상실한 서구인들에게 실존주의는 특별한 대안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실존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한 거부 를 주장함으로서 기독교를 기반으로 하는 서구 문명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하고자 하는 시도라고 규정할수 있다.

 

흔적과 지속

실존주의는 맹렬히 타오르다 사라지는 불꽃처럼 2차 대전 전후에 큰 영향을 준 후에 구조주의라는 또 다른 사상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그러나 실존주의가 전하는 서구 전통적 사상의 기본적 명제에 대한 거부는 서구사회의 또 다른 변화도 불러일으키게 된다. 서구 사회에 여성의 자리를 마련해 준 페미니즘, 반식민주의, 인종차별철폐 등의 변화를 실존주의와 완전히 별개의 움직임으로 고찰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실존주의 사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소설에서 사용했던 독특한 기법들은 후대에 이어져 서구의 소설 장르 자체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소설들의 출간으로 나타났다. 구조주의가 실존주의에 내재한 휴머니즘을 부정하며 나온 새로운 사조라고 하지만, ‘본질에 대한 거부’라는 실존주의가 없었다면 이 학문적인 움직임은 탄생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필자가 문학 강의 때 열심히 ‘부조리’를 설명하다가 학생들을 살펴보면 ‘왜 다 아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 하는 얼굴들과 가끔 마주하게 된다. 아마 그 이유는 신이 사라진 후 인과관계가 상실된 세계, 끝없는 공허 앞에 버려진 인간, 무한한 자유 아닌 자유를 얻은 후 두려움에 떠는 사물의 세상에 던져진 인간이라는 실존주의적 이미지가 이제는 우리에게 크게 새롭지 않기 때문일지 모른다. 그리고 실존주의가 철 지난 사조로 잊혀진 것이 아니라, 이 철학이 남긴 고민과 반항으로 인해 이미 실존주의적 인간으로 세상과 마주하는 법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사르트르는 지난 세기의 인물이지만 동시대의 일상에서 아직 살아있는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사르트르의 이와 같은 면모에 대해 다음과 같은 헌사를 남기고 있다.“ 사르트르가 어떤 일의 시초인지 종말인지 의문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창조적인 사람이나 사물이 그렇듯이 그는 중심이고 중심으로 밀려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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