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간신문을 펼쳐드는 순간 굉장히 화가 났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 세월호 인양 논의를 시작하였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은, 극적으로 추가 실종자가 발견되면서 흐지부지 되었지만, 사실 이보다 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예 세월호를 인양하지 말고, 그냥 바다 속에 내버려 두자는 의견도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사회적 비용이 높다는 것이다. 차라리, 그 비용을 아끼고 유가족에게 다만 얼마라도 더 주는 게 낫지 않겠냐는 주장이다. 자기 아이들이 물에 빠져 돌아오지 못한다고 해도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정말이지, 답답한 마음을 넘어 절망적인 생각까지 든다.

세월호 문제를 다루는 것이 마치 글쓰는 이의 자기 알리바이 같아서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쓰지 않을 수 없다. 아마, 이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것 같다. 지난 여름 실천문학사에서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는 공동 추모시집이 나왔고, 또 얼마전 문학동네에서 <눈먼 자들의 국가: 세월호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라는 산문집이 나왔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세월호’ 사건을입에 올린다는 것, 혹은 그 이야기를 글로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다. 왜냐하면,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제나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존재나 사건을 손쉽게 소재화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의 순수한 의도나, 진정성과는 무관하게 ‘대형 재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에는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썼다. 세월호 공동추모시집 <우리 모두가 세월호였다>에서도, 산문집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도 작가들은 쓰고, 또 썼다. 그들의 펜 끝에는 단 한 명의 실종자도 구조하지 못한 ‘국가’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이 가득하다. 문학성 따위는 염두에 둘 문제가 아니라는 듯, 그리고 평소의 자기 작법과 문장 스타일이 무엇이 중요하냐는 듯, 오직 ‘세월호’라는 사건의 의미를 파헤치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의 태도는 들떠 있지 않다. 오히려 작가들의 문장에서 무거운 시대 정신과 진정성이 느껴진다. 소설가 박민규는 표제작‘ 눈먼 자들의 국가’에서 세월호는 처음부터 두 가지 프레임이 겹쳐 있었다고 적고 있다. 하나는 세월호가 “선박이 침몰한 사고”라는 시선이며, 또다른 하나는 “국가가 국민을 구조하지 않은 사건”이라는 시각이다.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책의 엮은이 신형철이 잘 정리하고 있는 것처럼, 사고는 “사실과 관계하는, 처리와 복구의 대상”인 반면, 사건은 “진실과 관계하는, 대면과 응답의 대상”이다. 그러니 세월호를 단순한 ‘사고’로 이해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 사태를 어서 ‘처리’하고 ‘복구’해야될 대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니 세월호 사건의 진실에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다. 세월호 사건이 ‘교통사고’와 다르지 않다고 말한 여당 국회의원의 발언은 이런 몰지각함의 대표적인 예이다. 세월호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위악을 고통스러운 얼굴을 통해 가시화한 파국적 ‘사건’이다. 그래서 세월호를 사건으로서 바라본다는 것은 그 동안 우리사회가 은폐하고 있던 적페를 파헤치는‘진실 찾기’의 여정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우리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싸움이 쉬울 리가 없다. 지금도 저 위정자들은 세월호 사건을 어서 빨리 처리해야 할 복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은가.

작가들은 하나 같이 세월호 사건이 우리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을 척결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말한다. 진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비명을 지르며 바다 속으로 빨려 들어간 아이들의 슬픈 얼굴을 대면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분명, 그것은 두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뜨지 않으면 끝내 눈을 감지 못할 아이들이 있기 때문”(박민규)에, 우리는 다시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이 정말로 우리 삶의 진실에 이르는 길임을, 또 그것이 작가들의 말이나 문학 작품보다 훨 씬 더 문학적인 응답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박형준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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