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없는 날들이다. 부정선거 의혹부터 국가적 재난의 연속, 언론 통제까지. 적어도 지금의 20대에게는 교과서에서나 봤을 법한, 낯선 광경이다. 과도기일까. 일찍이 최남선은 「해(海)에게서 소년에게」에서 소년의 계몽을 노래했다. 파도치는 바다와 각성하는 소년의 모습에는, 급격하게 밀려오던 혼란과 그의 시대 의식이 고스란히 묻어있다. 이는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물론 시대적인 차이는 크다. 허나 또 다른 파도가 몰아치는 현재의 상황은 당대와 비견할 만하다. ‘20대가 바뀌어야 나라가 바뀐다’는 혹자들의 구호 역시 매한가지다. 지금, 20대, 우리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다만 한 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파도를 마주하고 있는지.

세월호 인양 문제를 두고 많은 얘기가 오갔다. 갑론을박이라 하기엔 일방적인 얘기들. 추가 실종자의 발견이 이를 자연스레 흘려보냈지만, 그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의제를 던진 언론을 차치하더라도, 여론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다 그만두고 인양하라거나, 더 이상 다른 국민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말는 ‘진부한’ 얘기. 심지어는 세월호를 마냥 내버려두자는 말까지 나왔다. 논지를 펼치는 것이 바로 20대, 우리라는 사실은 실소를 자아냈다.

논쟁이 아닌 관망이다. ‘지겨우니 그만하라’는 의식이 관통하고 있다. 200일이 넘는 시간동안 진도 앞 바다만 바라보고 있던 유가족에게는 타자의 시선만이 존재한다. 바다는 침체됐고 ‘우리’는 침몰했다. 침묵만이 남아있다.

잘못된 인습이 자리 잡고 있다. 언제부터였는지, ‘실천하는 행동’은 단순한 정치싸움으로 변질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뜻 있는 행동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고 희망의 끈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언론은 일부의 자극적인 행위에만 주목한다.

우리의 프레임 역시 보수와 진보, ‘좌좀’과 ‘수꼴’의 싸움에 혈안이 됐다. 20대가 이를 주도하고 있고,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매개가 이를 뒷받침한다. 너나할 것 없이, 대수롭지 않게 서로를 비난한다. 가히 전쟁이다. ‘뜻’은 주목받지 못하고 목적은 전치됐다. 모든 사안이 흑백논리로 귀결된다. 매몰, 결국 진전 없이 제자리에 머물고 있다. 모두 자초한 일이다. 오늘도, 내일도 침체시키고 있다. 스스로 파도가 되고 있다. 자조해야 할 때다.

얼마 전 가수 신해철이 작고했다. 쓴소리를 서슴지 않고 세상을 직접적으로 비판하던 그. 신해철은 동명작 「해에게서 소년에게」로 ‘그때의 우리’를 위로하고 응원했다. ‘무능한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사회를 바꾸려‘ 그렇게 되지 마’라고 노래하던 그였다. 물론 ‘지금의 우리’는 기억

하지 못한다. 머리가 미처 여물기 전이었다. ‘N.E.X.T 세대’가 아닐뿐더러, 그와 함께한 기억이라고는 고작해야 잠깐의 시트콤과 수많은 논란들뿐이다. 그의 영향력은 우리 세대에 미처 번지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더 이상 노래하지 않는다.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는다. 아픈 청춘을 강요하는 사회를 핑계 삼아, ‘바쁘니까 그만하라’고 진저리친다. ‘바다’도,‘ 우리’도 없다. 파편만이 남아있다. 지독히도 외롭다. “사회적 발언을 하느라 시간이 없어서 판을 아직 26장밖에 못 냈고. 해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전국투어를 돌고, 해마다 앨범을 한 장밖에 못 내서 미안하다”며 웃던 그가 유난히도 그립다. 어쨌거나 서글픈 오늘이다.

   
 이광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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