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해주 초대 편집국장

 

   
 

달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다만 낮에는 강력한 햇빛때문에 잊힐 뿐이다. 얼핏 멈춘 듯 보여도 달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끝없이 움직이며 온 힘을 다해 빛을 뿜어낸다.

백발의 시인은 올해 가을 시집 <멈추지 않는 달빛처럼>을 펴냈다. 어쩌면 이번 시집의 제목은 그의 인생을 표현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6·25 종군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섰고, 수많은 시집과 수필집을 발간했다. 우리학교 상과대학 학장, 일본 후쿠오카국제대학 교수를 역임한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경력이 있다. <부대신문> ‘초대 편집국장’. 60년 세월을 입은 <부대신문>을 들고 이해주 교수의 자택을 찾았다. 화려하지 않지만 잔잔한 달빛과 같아 더 오래 기억되는 그의 도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봤다.

△<부대신문>이 처음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과정으로 발행됐는지 궁금합니다

이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도 발행 못했거든. 어쩌다 한번씩 나오는 정도였어. 게다가 부산이 인쇄사정이 굉장히 안 좋았어. 인쇄는 오직 동감동 국제신문 제2공장에서 활판인쇄를 했어. 제대로 교정보고 편집을 해두어도 밤새워 지켜볼 수도 없으니까 오탈자가 굉장히 많았어. 심지어 한 번은 졸다가 대(大)통령을 견(犬)통령으로 쓴 적도 있지(웃음).

그 때에 윤인구 초대 총장이 신문이 좀 깨끗하게 나올 수 없느냐고 물었고, 인쇄 사정을 말씀 드렸지. 그러니 당시 서울 지역 대학신문들이 깨끗한 종이로 나오는 걸 보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를 이용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어요. 한 번 인쇄해봤는데 아주 깨끗하게 나오니까 학교가 뒤집힐 정도로 교수들과 학생들이 좋아하고 반응이 뜨거웠어. 그 이후로 앞으로 서울에서 인쇄하자고 결정했지.

그때부터 1년 동안 혼자 왔다갔다 했어. 교통비 아끼려고 서울행 급행열차 밤 10시에 타면 서울에 새벽 4시에 도착했어. 힘들었던 것 중 하나는 원고 청탁을 하면 교수들이 원고를 제때 주지 않고 펑크 내는 적도 많았어요. 철자법도 안 맞고 문장도 형편없는 경우도 많았어. 일일이 고치고 메워 넣고 잠도 거의 못자고 신문을 냈지 거의 1년 동안.

△취재나 기사 작성을 도와주는 사람은 따로 없었나요

4면짜리 원고를 모두 혼자 썼지요. 발행 끝나면 사람이 녹초가 됐어요. 교수에게 받는 글도 있었는데, 맞춤법이 엉망인 원고를 고치는 작업도 내 몫이었지. 그런 원고 받으면 억장이 무너져. 사실 당시에는 그렇게 글을 쓸 수 있는 필자들이 별로 없기도 했어요. 편집이나 디자인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어요. 지면에 빈자리가 나오거나 자투리 공간이 남으면 그 공간에 맞는 기사를 써는 정도였지요. 하지만 신문에 대한 반응이 좋으니 뿌듯했지. 이럴 때 신문사 운영을 궤도에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월간으로 나오기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결국 월간 발행을 이끌어냈지.

△혼자 취재, 기사, 편집, 인쇄까지 담당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나중에는 기자를 모집해서 운영했을 것 같은데요

편집인 보좌원으로 발령받은 것이 1957년이었을 거야. 첫 번째 견습기자를 뽑은 건 1958년으로 기억해요. 당시 나는 편집실장이었지. 발행인이 총장이었고, 편집인은 학생처장(당시 교학처창)이었어. 당시 <부대신문>은 인기가 워낙 좋아서 경쟁률이 높았습니다. 지나가는 학생을 간단하게 인터뷰하려 해도 서로 하고 싶어 할 정도였지. 채용시험에서는 간단한 작문도 하게 했고 최인훈의 <광장>을 봤는지, 읽었다면 무엇을 느꼈는지 등을 물어서 나름의 기준으로 뽑았어.

월간 발행을 쟁취하고 나서는 신문사의 예산 독립이 편성이 필요해서 총장을 설득했어요. 결국 학생들이 등록금을 납부할 때 신문비를 별도로 받게 됐습니다. 사실 이걸 쟁취하는 데 제일 많은 애를 먹었습니다. 별도 예산이 1년씩 잡히니까 그렇게 별도로 책정된 예산이 생기니까 <부대신문>의 체제를 강화할 수 있게 됐어. 지금 생각해보니 엄청 고생했네.

인터뷰 도중 이해주 교수는 미리 준비해둔 오래된 사진 한 장을 꺼내 놓았다. 사진 속에는 윤인구 초대 총장을 인터뷰하는 그의 모습이 담겨있다. <부대신문>을 앞에 펴놓고 인터뷰하는 모습이 인상 깊다. 사진의 빛바랜 색깔에서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이 교수의 눈빛은 열정 가득했던 20대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처음 편집보좌원으로 발령받은 계기는 무엇이었는지요? 그 이전부터 관련된 활동을 하셨나요

우리학교 학도호국단 학예부장이었지. 당시 대학마다 학도호국단이 있었는데, 그 때 신문에 대해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게 인연이 되어 편집보좌원이 됐습니다. 나중에는 1968년에 가장 젊은 나이에 주간 교수도 했습니다. 임기도 6년이 넘었는데, 주간교수 중 가장 오랜 기간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

△<부대신문> 활동 뿐 아니라 교내에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고 들었습니다

교지편집위원회를 만들어 <효원>을 발간할 수 있도록 했지요. 학생과 교수를 한 데 어울리게 할 수 있는 문필의 광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지금까지 그런대로 잘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 ‘효원춘추’도 빼먹을 수 없지. <부대신문>에 교수님들 칼럼을 받아 꾸리는 고정란이 있었거든. 그걸 다 따로 모아서 ‘효원춘추’를 발행하기도 했는데 상당히 인기가 있었어. 사방에서 보여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지.

△학생일 때도 신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하셨는데, 이후에는 기자가 아니라 교수가 되셨습니다

안 그래도 당시 국제신문 주필이 논설위원으로 초빙하고 싶다고 요청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나는 이미 제대하고 나서 <부산일보> 보급소와 계약한 상황이지. <부산일보> 쪽에 국제신문의 제안에 대해 이야기 했더니 가지 못하게 하면서 차라리 부산일보에 자리를 주겠다는 겁니다. 하지만 나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어. 이미 부산일보에 있던 논설위원들이 모두 내 선배 아니면 은사들이었거든. 내가 가면 그 분들 중 한 명이 일을 그만 둬야 했어요. ‘못 가겠다’ 생각하던 차에 마침 대학에서 ‘강의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의가 온 거야. 그래서 문리대 경제학과 시간강사로 교수직을 시작했어요.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치열하게 살았던 시대였습니다.

△편집국장에 이어 주간교수까지 맡게 되신 계기가 궁금합니다

신문과 관련된 경력이 있다 보니 주간교수 요청이 온 것 같아요. 주간교수로 일할 때 재밌는 일이 하나 있었어. 박정희 전 대통령이 우리학교에 왔을 때 당시 총장이 신문에 ‘각하’라는 호칭을 사용하라고 지시하는 겁니다. 기자들은 ‘각하가 뭐냐’라고 반발하며 넣지 않겠다고 거부했죠. 하지만 끝내 총장에게 굽힐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일이 몇 번 있다 보니 신문사 내부적으로 쌓였던 게 많았던 것 같아요.

△<부대신문> 축쇄본에 남긴 회고록에‘ 주간교수 때 기자들의 욕구를 채워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서술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 알고 싶습니다

웬만하면 학생들 편을 많이 들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지금도 많이 듭니다. 중간 위치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다가, 결국 절충하면서 마무리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아요. 한번은 기자들끼리 술을 마시고 파출소에서 난리를 피운 적도 있어. 자주 찾으러 갔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원하는대로 기사를 쓰지 못하고 취재도 못하는 상황에서 객기 부리는 거였지. 그만큼 <부대신문>에 애정이 많았던 것 같아요.

△가장 궁금했던 질문입니다. 만약 시간을 돌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때도 다시 <부대신문>과 함께 하시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신 이유도 궁금합니다

물론 다시 하고 싶어요. 그만큼 <부대신문>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애정이 있는 곳이예요. 애정이 없었으면 그렇게 집중 할 수 없었겠죠. 서울 동아출판사를 그렇게 1년 동안 다니면서 얼마나 혼쭐이 났는데요. 당시 <부대신문>은 학교의 모든 교수들에게 다 돌아가고, 거의 모든 학생들이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지.

△과거에도 그랬듯이 지금도 학생기자들이 매주 취재를 하고 기사를 쓰고 <부대신문>의 역사를 이어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활동하는 기자들에게 어떤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글쎄, 요즘 보니까 신문이 너무 퍼질러져서 초점이 없더라고‘. 메아리’같은 고정란은 우리가 만들 당시에는 학생들이 많이 읽고 반응이 굉장했지. 요즘에는 학생들도 신문을 많이 보지도 않고 만드는 사람도 나사가 풀려있는 것 같아. 당시 <부대신문>에서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문예창작대회도 열고, 참여율도 대단했어요. 무엇이든 의욕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나름대로의 정열과 역사에 대한 바른 인식이 있어야 돼. 그게 없으면 혼 빠진 것이나 같잖아.

△<부대신문>이 올해로 창간 60주년을 맞았습니다. 환갑을 맞은 <부대신문>에 대한 소회가 궁금합니다

소회라기보다는 당부하는 말이 될 것 같아요. 지금처럼 여건이 좋은 상황 속에서 더 신문을 잘 만들어야 돼. 먼저, 학생들에게 즐겨 읽힐 수 있는 신문을 만들어야 된다는 걸 잊어서는 안 돼요. 항상 살아있는 뉴스를 전달하면서, 학생들의 마음에 와 닿고 그들이 호응할 수 있는 코너를 개발했으면 좋겠습니다. 또 만드는 사람들이 열정을 쏟은 만큼 전달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건 저절로 전달되는 것이지, 억지로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야. 마지막으로 열정이 있어야 해요. 내용에도 맺고 끊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열정이 없으면 잘 드러나지 않을 겁니다. 만드는 사람이 그만큼 열정을 가지고 만들면 많은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기자와 교수직을 거치면서 틈틈이 글을 써 온 이해주 교수. 그 동안 써 온 많은 수필집과 시집 중 가장 아끼는 첫 작품의 제목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 6.25 참전 후 그는 자신의 인생을 ‘덤으로 사는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덤으로 살게 된 인생은 온전히 우리학교, 그리고 <부대신문>과 함께 한 시간이었다.

“지금도 나는 그래요. 인생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즐기면서 해야 되는데, 그렇다고 남아도는 기술처럼 여기지 않아야 합니다. 전력투구를 해야 해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인간으로서 해야 할 일을 다하고 나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을 잊지 않아야 돼. 하루하루를 전력투구를 하며 살아가노라면 자기 운명에 광채가 나는 날이 오게 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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