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군대에서 날아오는 후임병 학대, 무장 탈영, 병사의 자살 같은 소식은 우리를 걱정스럽게 한다. 국가 사회의 주역인 시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를 감당하기로 약속한 시민 병제 하에서 이런 문제가 자주 발생한다는 것은 국가의 기강이 흔들리는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응은 당사자에 대한 징벌과 군대 문화의 개선이라는 방편적 대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이런 중차대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려면 ‘시민사회에서 시민병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가지고 역사를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역사적 경험을 통해 시민사회에서 개인의 권리와 병사로서의 사회에 대한 봉사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관되어 있는지 검토해 보면 우리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는 좀 더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기원전 490년, 지금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에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해안 도시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과 아테네군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다리우스 대왕이 다스리던 페르시아는 이란 고원에서부터 터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이었던 이라크에서 이집트까지 지배하는 대제국이었고, 아테네는 제주도의 절반 정도의 면적을 가진 작은 도시국가였다. 당시 역사서는 다리우스가 600척의 함선과 20만 명의 군사를 마라톤으로 보냈다고 적고 있다. 하지만 고대 기록의 부정확함을 고려하여 현대 사가들이 추정한 페르시아 병력 규모는 대략 보병 2만 5천과 기병 1천 명 정도다. 반면 아테네에서는 전투에 임할 수 있는 시민 모두가 참전했음에도 병사 수는 1만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아테네군은 마라톤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당시 전투에서 아테네군 192명이 전사한 반면 페르시아군은 6천 명이나 전사했다고 전하며, 이는 페르시아의 전제정에 대한 민주정 하의 자유로운 시민들의 빛나는 승리였다고 적고 있다.

사실 페르시아 병사들은 제국이 지배하는 여러 나라로부터 동원된 병사들이었던데 비해, 아테네 병사들은 스스로 청동 갑옷과 투구, 방패와 창을 구입해 전투에 나선 농민, 상인, 수공업자들이었다. 아테네에서 이런 형태의 시민병제가 행해지기 시작한 것은 대략 기원전 7세기 중엽부터였는데 시민군이 이렇게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 군에 맞서 두려움을 떨치고 싸울 수 있는 결속력을 가지게 된 것은 민주화 덕분이었다.

아테네도 초기 소수의 토지 귀족들이 정치 권력을 독점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해외 진출과 무역의 확대로 새로운 상공인층이 형성되고 전통적인 소농층의 빈곤화가 진행됐을 때 새로운 상황에 맞게 제도 개선을 해 나갔다. 솔론의 개혁으로 시작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6세기 내내 진행된 민주화 과정은 사회적 갈등과 격변을 동반하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시민들의 경제적 자립과 동등한 발언권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빚을 져 노예로 팔려가게 된 농민의 부채를 탕감하고 토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취했으며, 유력 가문이 독점하고 있던 정치적 권리를 축소하고 보통 시민들이 참여하는 민회의 권리를 확대해 나갔다.

이렇게 시민들의 재산과 정치적 권리를 보장한 아테네는 시민들에게 정의롭고 고마운 조국이었다. 시민병은 자기 재산과 정치적 권리가 있는 자들이었고, 그것을 보장한 것이 자기의 조국이라고 믿었던 자들이었다. 조국을 지키는 것이 곧 나의 생명, 재산, 자유와 권리를 지키는 것이었다. 이것이 그들의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국심의 뿌리였고, 외침을 물리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다시 돌아와 우리의 병사들을 본다. 우리의 병사들이 가진 것은 무엇이고, 우리 사회는 그들에게 무엇을 보장했나. 그들은 아무 가진 것 없는 20대 청춘이며 국가에 대한 봉사 후엔 취업전쟁에 내몰리고 연애, 결혼, 출산마저 포기해야 하는 3포세대가 아닌가. 그들의 애국심은 어디에 뿌리를 박고 조국에 봉사할 것인가. 우리의 시민병들은 자신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 사회를 무슨 힘으로 지킬 것인가. 

박경옥 서울교육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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