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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왜 ‘부마민주항쟁’을 잊었나
  • 김윤경 기자
  • 승인 2014.10.13 12:14
  • 호수 1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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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일어난 사건으로만 추억되고 있다는 것이 참 비참하고 원통한 일입니다”

부마항쟁을 시작했던 정광민(경제 78, 졸업) 씨의 말이다.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일어났지만 이 땅에서조차‘ 부마 사건’‘, 부마 사태’라고 불리던 항쟁. 부마항쟁은 왜 우리들에게서 잊혀진 것일까?

부마민주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우리학교에서 시작돼 부산과 마산 전역으로 확대된 민주항쟁이다. 독재 권력에 대한 저항, 민주적 변혁에 대한 갈구가 터져 낮에는 대학생이, 저녁에는 시민이 주축이 돼 움직였다. 미리 계획되거나 의도된 시위가 아니라 당시 정치·사회적 상황이 결합돼 일어난 사건이라 더욱 역사적 의미가 크다. “군부 독재 타도, 유신 철폐”라는 구호가 최초로 사용된 것도 부마민주항쟁이었다. 때문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 등 민중항쟁사에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홍순권(동아대 사학) 교수는 “1960년 4월 혁명과 80년 5·18, 87년 6월 항쟁을 잇는 중요한 항쟁”이라고 말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사살한 10·26의 배경으로 지목받기도 한다. 당시 ‘부마 사건’의 처리 문제가 군부 집권층 내부의 갈등이 커지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행봉(정치외교) 교수는 “18년간 이어온 박정희 군부 정권 청산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며 “유신독재 시대에 민주화의 물꼬를 튼 최초의 민중항쟁”이라 고 평가했다.

 

소외당한 역사, 억눌린 기록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35년째. 그러나 아직까지 진상 규명도 이뤄지지 못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2010년 극히 제한적인 공식 조사 결과를 발표한 것이 전부다. 이때 공식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의 진압과정에서 계엄군·경찰에 의해 학생·시민들이 폭행을 당해 상해를 입거나 인권침해를 받았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수사과정에서 연행된 시민들이 불법구금 및 구타, 성희롱 등 가혹 행위를 당했다는 것도 밝혀졌다. 당시 동래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던 정광민 씨는 “아버지가 이북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정간첩의 아들로 취급받았으며 조사 과정에서 물고문 등 각종 고문이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보상으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차성환 이사는 “정부에서는 시위 당시 사망자나 행방불명자가 없다고 일관하고 있지만 2011년에 마산 노동자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확인되는 등 의혹이 있다”며 “하루빨리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공개된 정부 기록은 다섯 손가락에 꼽힐 정도로 적다. 부마민주항쟁으로 1,500여 명이 연행됐고 80여 명이 군법회의에 회부됐지만, 지금까지 공개된 정부 문서는 ‘부마사건 군법회의 재판 기록’이 유일하다. 이마저도 마산 시위 참여자의 재판 기록이 대부분이다. 공개된 기록 중 부산 시위 참여자의 재판 기록은 정광민 씨의 수사보고서뿐이다.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정윤식 연구원은 “부산 경찰의 수사 자료조차 공개되지 않았고 공개된 자료도 단편적인 사료에 불과하다”며 “정부에서 진상 규명을 할 의지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부마항쟁은 왜 잊혀졌을까?

부마민주항쟁은 이처럼 유신 독재에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데 큰 공헌을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하지만 4·19, 5·18, 6월 항쟁으로 이어지는 민주화의 원류에서도 소외당하고 있다. 매년 기념일을 지정해 각종 기념행사가 개최되고 있지만 부마민주항쟁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턱없이 적다. 이토록 부마민주항쟁이 홀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① 연이어 터진 사건의 그늘

부마민주항쟁 이후로 연이어 터진 각종 사건의 그늘이 컸던 것이 주요인으로 지적 받는다. 항쟁 발발 10일 만에 일어난 10·26사태가 대표적이다. 10월 16일 ‘군부 독재 정권과 유신 철폐’를 외치며 시작된 부마민주항쟁은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급작스레 마무리됐다. 항쟁의 목적이 달성되면서 시위는 자연적으로 가라앉았고, 정권이 무너지면서 구금됐던 시위자들도 풀려나왔다.

피해 규모와 파급력이 컸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그늘도 있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부마민주항쟁보다 규모도 컸고 희생자도 많았던 사건이다. 홍성권 교수는 “연달아 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면서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조차 부마항쟁에 대한 역사적 평가 작업이 적극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고 분석했다.

②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적 행보

1987년 민주화 이후 팽배한 지역주의 정당 정치 분위기와 1990년 일어난 3당 합당 또 한 중요 요인 중 하나다. 당시 부산의 분위기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마민주항쟁 불과 2개월 전에 벌어졌던 YH무역 사건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YH무역 사건이란 가발제조업체인 YH무역의 부당한 폐업을 이유로 노동자 20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던 일을 말한다. 당시 경찰의 폭력 진압으로 사망자와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의원직에서 제명됐는데, 바로 이 사건이 김영삼의 정치적 본거지였던 부산에서 항쟁이 일어나는 계기가 됐다.

부마항쟁 이후 민주화 운동이 계속되면서 군사정권 청산 요구가 계속됐다. 그러나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주 진영에 균열이 생겼다. 제5공화국의 후신세력이자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2개의 야당과 합당하는 것에, 민주 진영의 주요 인물이었던 김영삼이 합당에 동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차성환 이사는 “항쟁의 촉발 원인이 됐던 사람이 독재 정권과 합당했지만 일부 지역주의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며 “이 사건으로 지역 민주운동세력에 변화가 있었다”고 전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기에도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처벌에 집중되면서 부마항쟁에 대한 조명은 이뤄지지 못했다.

③ 자연 발생한 시위

체계적으로 계획된 시위가 아니라 자연 발생한 시위라는 점도 한 요인이다. 역사적 사건이 후대에 평가를 받기 위해서는 당대의 사료가 필수적이지만 부마민주항쟁과 관련된 사료는 많지 않다. 부마항쟁을 시작했던 학생도, 참여했던 시민도 시위가 커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인수 씨는 “당시에는 시위에 관한 기록을 생산해서 남기는 일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다”며 “의도되거나 조직화된 시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시위 과정에 대한 기록물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자연 발생해서 더욱 큰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후대에 전해진 사료가 적다는 것이다.

 

부마민주항쟁이 저평가된 원인으로 많은 요인이 손꼽히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 모두가 부마민주항쟁을 잊고 있다 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학자들은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홍순권 교수는 “국민 모두가 함께 반성해야 할 부분”이라며“ 부마항쟁에 대한 진실 규명과 역사적 평가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김윤경 기자  yoonk93@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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