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 대한 하나의 반성으로 시작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가. ‘나’는 대학인인가.

언제부턴가 대학은 사회와의 소통을 거부했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본다. 2014년 4월 이후로 한국 사회의 아젠다를 바꿔놓은 세월호 사건은 어느새 캠퍼스에서 잊힌지 오래다. 그 흔한 노란 리본도 없다. 대학은 침묵했고, 국가 위정자와 대학 경영자는 환호했다. 한때 사회와 거리를 둔 대학이 반가운 적이 있었다. 수많은 자본주의적 자극으로부터 학문의 성숙과 대학생의 지성을 위해 보호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은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다. 캠퍼스의 안온은 항거를 모르는 미숙아를 낳았고, 숙성되다 못해 지나치게 발효된 애늙은이를 낳았다. 대학을 들어오는 순간부터 취업걱정을 하는, 연애하자마자 노후대책을 꿈꾸는 이들이 지금 부산대학교를 활보하고 있다.

사회와 소통 없는 대학은 하나의 무대(舞臺)가 되어 유희와 향락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었다. 이를 창조적 저항 없는, 사회적 이슈가 사라진, 그리고 ‘대학과 사회’를 더 이상 말하지 않는 2014년 시월제에서 확인한다. ‘시월’은 부산대학교의 자랑스런 기억이다. 다른 학교는 갖지 못한 우리만의 옹골찬 역사다. 지독한 군사정권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민주의 싹을 지키기 위해, 우리의 선배들은 교문을 박차고 나갔다. 10·16 기념관이 놓인 자리, 기념석비가 서 있는 그 어름에서 민주화의 함성이 시작되었다. 지금은 당연시된 민주화, 이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선배의 거친 호흡과, 이를 잇는 후배의 열정, 끝내완성하고야 말 사회와의 소통, 이것이 바로 부산대학교가 시월을 기려 축제로 만든 이유였다.

허나, 지금 우리 캠퍼스를 한번보시라. 학교 구석구석에 배어있는 술향기와 기름 냄새, 흡사 클럽에 와 있는 듯한 선정적인 음악과 눈빛들, 포르노의 경계를 넘나드는 춤사위에 빼앗긴 넋들, 그 어디에 대학인다운 모습이 있던가. 도대체 우리의 열정이 이렇게 참혹하게 소비되어야 하는가. 참으로 비통할 뿐이다.

저마다 대학의 위기를 진단하고 대처방안을 내놓는다. 십인십색이요, 각자도생이다. 학문공동체의 공정한 기획은 사라지고 자신의 사적욕망을 방사(放射)하고있을 뿐이다. 특히 국립대학교인 부산대학교는 흡사 사공 없는 배처럼 닥쳐오는 쓰나미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런 즈음 시월제는 부산대학교 구성원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추락할 것인가, 비상할것인가.

아, 어떻게 할 것인가. 쉽지 않겠지만, 우리 소박한 마음을 찾고 키우는 일부터 다시 시작하도록하자. 아주 오랜만에 성학관에 발길이 멈췄다. 건물 1층에 있는 게시판 사진들은 하나의 충격이었다. 그곳에는 장애를 가진 이들과 어우러진 우리 대학생의 밝은 얼굴과 웃음이 있었다. 그들과 마음을 통하고자 수화를 배우는 젊은 열정도 있었다. 설령 전공학문과 관련된 홍보사진일지라도 나는 그곳에서 희망을 본다. 대학인이 지녀야할 소박한 품성은 현란한 몸짓과 고상한 담론에 있지 않다. 남과 공감하는 웃음과 눈물이란 소박한 행위에서 사회와의 소통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우리, 더 이상의 나락을 허용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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