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권(물리) 교수

   난 12살 겨울에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를 시신으로나마 찾은 것은 이듬해 봄, 120일이나 지나서였다. 한강으로 낚시를 가셨다가 배가 뒤집혔는데, 시신을 찾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난 아직도 그해 겨울을 똑똑히 기억한다. 서른넷의 꽃다운 나이의 어머니와 나와 연년생인 내 동생, 이렇게 우리 세 식구가 청천벽력처럼 당한 재난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야 했는지, 매일같이 잠수부들과 흥정을 해야 했고, 세상이 우리와 아무 상관없이 잘 굴러가고 있다는 것도, 그저 이런 사고를 당한 우리만 멍청하고 비참할 뿐이란 걸 깨달아야 했다.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난 그 당시의 아버지보다도 훨씬 나이를 먹고, 대학에 갓 입학한 딸을 둔 아버지가 되었다. 

  그 날 이후, 난 세상을 믿기보다 종교와 신념을 믿었고, 80년대 전두환 정권이 표방했던 정의사회구현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도 똑똑히 보았다. 범생이에 공부도 곧잘 하긴 했지만, 기존의 틀에 꽉 박힌 선생님이 모르는 더 큰 세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책에 몰두했다. 고교시절 최루탄 냄새가 스며들어오는 교실 안에서 사회 선생님은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괄호식 문제를 몸둥이로 가르치고 있었다. 지금 저 최루탄과 대학생들을 두들겨서 잡아가는 것이 민주주의냐고 질문하자, 선생님은 얼굴이 시뻘개져서 나를 두들겨 팼다. 너 같은 놈이 대학가서 데모하는 거라고. 선생님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지만, 대학에서 내가 맞닥뜨린 것들은 어김없이 고민의 연속이었다. 난 험악한 시절 전경들에게 두들겨 맞으면서도, 돌을 드는 선후배들에게 예수는 돌을 들지 않았다고 항변했었고, 소신과 다른 이념에 사사건건 반기를 들기도 했다. 교회가 독재자의 조찬기도회를 주관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 목사님과 밤늦도록 논쟁을 하고 신학대에 청강을 나가면서 난 ‘믿음이 약해 시험에 든 자’가 되어 교회를 떠나야 했고, 내가 전공하던 천문학으로는 세상을 바꾸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다른 전공으로 전과나 휴학, 재수를 고민했다. 산동네에 야학을 세우고 과로와 질병에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응급차 속에서도 미안함에 울어야 했고, 그리고 마침내 도망치듯 학부만 졸업하고 맨주먹으로 유학길에 오르면서, 언제고 무엇이 되건 이 사회에서 나의 역할을 찾고야 말겠다고 다짐했었다.
 
  이제 어느덧 생면부지의 부산에 와서 대학교수가 되고, 이런 것들을 모두 담담히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3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나. 연애는 물론 공부조차도 사치스럽던 교정엔 이제 활달하고 분주한 학생들로 넘쳐나게 되었지만, 영어와 취업, 고시공부와 스펙쌓기, 각종 지표에 치어 정작 대학가에 넘쳐나야 할 다양한 담론과 학문적, 사회적 고민은 오히려 더 찾아보기 힘들다. 분명 지금도 침몰하는 ‘세월(歲月)’과 분노할 공의가 많건만, 편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한 수단에는 열광하면서, 정작 삶의 목적은 실종되었다. 난 여태도 미안함과 부끄러움으로 잠을 못 이루겠는데, 양비론과 냉소로 침묵하면서 딴청이나 부리며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훨씬 더 견디기 어렵고 참담하다. 과연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곳에서 우리는 충분히 뜨겁게 살고 있는 것인가. 적어도 대학은 학원이 아니라 이 사회의 미래를 담보해야 할 상아탑이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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