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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시선, 정윤수가 ‘평’하는 지금의 모습정윤수 평론가
  • 이광영 기자
  • 승인 2014.09.22 16:50
  • 호수 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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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인물의 프로필을 살피는 것이다. 그런데 정윤수 평론가의 프로필에는 ‘학력’이 나와 있지 않더라. 칼럼을 꾸준히 쓰려면 즉각적인 감각과 정보만으로는 힘들 텐데, 정 평론가의 학력이 궁금하다.
뭐 특별한 사연은 없어요.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때 대학은 물론 고등학교 분위기도 굉장히 살벌했어요. 사상적 통제나 생활규범에 대한 통제가 굉장히 강했던, 전두환 시대의 통치가 굉장히 견고하고 잘 작동될 때였죠. 지금에야 이렇게 말하지만, 고등학생 때야 뭘 알겠어요? 그저 제가 읽고 싶은 책 읽어가며 여유롭게 있었죠. 제가 학교 문학회 회장이었어요. 그런데 이 활동이 당시의 기성세대와 갭이 있었죠. 그들에게 문학은 참여문학 아니면 순수문학, 두 종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제가 읽는 책을 보며 ‘왜 이런 책을 읽느냐’고 지적했죠. 마찰이 잦았어요. 징계도 많이 받고. 거기다 문학회 활동 때문에 대학로에 나갈 일이 있었는데, 마침 5·18 주간이었어요. 그러다 경찰에 잡혀서 학교로 보고되고. 또 한 가지가 동급생 중에 이사장 아들이 있었는데, 얘가 모의고사 성적은 겨우 백 몇 점씩 받는 애가 내신에서는 최고 등급이 되는 거예요. 얘 공부 못하는 거 다 알거든요? 나름 문학회 회장이다 보니, 이런 거에 대한 액션도 좀 있었고. 이것들이 연쇄되면서 학교를 그만둬야겠다고 결심을 했죠. 이런 제도 안에서 공부를 계속 해도 될까라는 개인적인 고민도 있었고요. 그 후에는 음악다방 DJ, 출판사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군대도 다녀오고. 노동운동 현장에도 한 3년 있었죠. 그러고 있는데 민중문화운동연합이라고, 같이 활동하던 선배가 잡지 하나 창간한다고, 같이 일하자고 하더라고요. 그게 <월간 예감>, 그 후에 <계간 리뷰>로 이어졌죠.

△평론가로서의 이력이 <계간 리뷰>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계간 리뷰>는 어떤 잡지였나?
지금 보면 굉장히 낡은 잡지죠. 그런데 90년대 중반,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문화에 대한 인식, 시장, 담론이 전무했어요. 대부분의 매체에서 대중문화를 경멸했었죠. 사탄이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제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뿐더러 산업도 이렇게나 커져 가는데, 대중문화에 대한 획기적인 재인식이 필요하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했죠. 또 제 관점에서는 대중문화를 저열하게 보는 시선이 오히려 천박해보였어요. 대중문화에 융합되는 대중의 욕망이란 게 현대도시에 남은 굉장히 중요한 증거들이거든요.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켜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단순하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인데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나’라는 생각이 앞섰어요. 그럼 내가 옹호하자, 이렇게 된 거죠. 일례로 장정일 작가가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변태작가라며 거의 쓰레기 취급을 받았어요. 근데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가 드러내는 강렬한 도발적 상상력에는 한국사회의 정신적 혼돈이 그대로 들어가 있거든요. 이런 생각을 가진 다양한 장르의 사람들이 모여서, 장르의 우열 없이 적극적으로 새로운 수로를 열게 된 거죠. 처음에는 대중문화를 통한 사회 읽기로 시작했지만, 나아가 하위계층에 대한 옹호, 정치적 지배자들이 일삼는 문화적 지배의 기만성·허위성의 폭로까지. 좋은 선배들을 만나 할 수 있었던 경험이죠.

△‘<계간 리뷰>가 나의 대학이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어떤 이유에선가?
말씀드렸듯이 장르적으로 문학, 영화, 미술,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의 선배들이 있었어요. 대부분 서울대, 연세대 재학생이었죠. 고맙게도 나이도 한참 어리고 학벌도 없는 저를 끼워줬어요. 같이 일하면서 편집회의도 하고 놀러 다니고. 그 시절이 저에게는 대학시절인 셈이죠. 대학으로 치자면 같은 학교에 굉장한 수준의 선배들이 계셨던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랑 매일같이 보면서 예리한 감각을 체험하고, 알아듣지 못한 말들은 집에 가서 혼자 공부하고. 그러면서 많은 걸 배웠던 거죠. 그 천재적인 평론가들 사이에서 살아있는 언어들을 직접 습득했어요. 무엇보다 선배들이 전부 글 못 쓰는 걸 싫어했어요. 내용이 아무리 풍부해도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경멸할 정도였죠. 다들 ‘스타일이 살아있는’ 글을 욕심냈어요. 스타일이라는 게 글재주나 표현능력이 아니잖아요? 세상을 다르게 보는 시선이죠. 그런 의미에서 <계간 리뷰>는 ‘아름다운 대학’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부터 주욱 평론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윤수 평론가가 생각하는 평론이란 무엇인가?
저는 딱히 ‘비평, 평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연구자, 학자로서의 길을 걷지도 않았고요. 출발은 단순한 의심이었어요. 20대 중반을 넘어설 무렵, 어떤 사회현상에 대해 비평도 아닌 단순히 인상적인 말을 떠들어대는 걸 보면서, 예를 들어 ‘경제가 나빠지면 미니스커트가 올라간다’, ‘TV는 바보상자다’ 같은. 흔히 말하는 거지만, 과연 그런가하는 굉장한 의심을 갖게 됐어요. 표면은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 이면에는 다른 사회적 욕망이나 문화적 코드가 겹쳐져서 이렇게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그래서 이게 맞고 틀리고 간에 새로운 관점으로 글을 쓰게 된 거죠.

 진부하고 익숙한 코드를 재해독해서, 그것이 그럴 리 없다고 반문 하는 것이 제 비평이에요. 흔히 쓰는 진부한 표현은 그 말을 쓰는 사람의 수사법이 부족해서가 아니에요. 거기에 고정된 세계관이 흡착돼있어서 그 표현밖에 나오지 못하는, 사회·문화현상을 그 틀 안에서만 보고 있을 뿐이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거죠. 결국 우리 눈에 보이는 수많은 현상들을 진부하고 틀에 박힌 대로 보다보니까 그대로의 언어만이 나올 뿐이에요. 그 틀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일수도,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일수도 있는데, 그런 관계가 언어에 녹아나서 우리에게 다가오거든요. 이를 비판도 하고, 폭로도 하고. 그 속에 숨겨진 모순을 포착해서 옹호하는 것. 기존의 관습적인 언어로 굳어져있는 구조의 형틀에 대해 비판하는 것. 그 균열 속에서 새로이 다가오는 미래적 상상의 가능성이나 현실의 울분을 옹호하거나 확장하는 것. 전 그것이 비평이라고 생각해요.

△정윤수에게는 어떠한 평론가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그만큼 소재로 쓰는 대상이 광범위한데. 평론 대상이 무엇인가?
  우선 현실적인 이유가 있어요. 만약 제가 특정한 범주의 제도적인 학문을 하는 사람이었다면 명칭을 달기 쉽잖아요. 어디 교수 무슨 전공. 그런데 전 현직이 딱히 없으니 뭐라고 해야 할지 고민이겠죠. 또 제가 썼던 많은 소재들이 분류하기 어려운, 제도 프레임 내에서 무엇이라 단정 짓기 힘든 것들이 많았어요. 뭐, 결국 제가 쓰는 대상은 사회·문화현상이니까 넓게 말해 평론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제 내면의 이유는 따로 있어요. 어떤 현상에 대해 비평을 할 때 그 사안에 대해 즉해 비평을 하겠지만, 길게 보면 우리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기에, 우리가 지금 어떤 현실에 처했기에, 어떤 문화적 욕망으로 끓고 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이 원인을 분석하는 게 제 목적이죠. 하나하나의 현상은 칼럼의 대상, 소재일 뿐이고요.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욕망이 특정 현상을 통해 투영돼서 드러나는 것, 이걸 찾아내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홍세화 선생의 ‘내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인가?’라는 말이 생각난다. 정 평론가는 왜 이를 찾아내서 비평하고, 또 글을 쓰려 하는가?
  홍세화 선생의 말씀, ‘내 생각이 과연 내 생각인가?’ 이 얘기는 ‘내 세계는 허위의식이다’, 즉 내 의식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주입되거나 강요된 의식 안에서 내가 인식하고 있다는 말이죠. 사실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현상들이 지배관계나 권력관계 하에 있거든요. 이게 겉으로는 하나의 사회적 사안일 뿐이에요.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죠. 그런데 이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 너무나 많아요. 그런 기만성, 허위성, 문화를 통한 위선과 그 구조의 반복. 이를 비판하고 또 다른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게 글을 쓰는 이유에요. 현실의 견고해 보이는 껍질이 너무나 무한한 거짓말과 위선으로 가득 차 있어요. 특히 이를 문화로 꾸며놓으면 굉장히 행복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광화문광장만 해도 그래요. 이것저것 꾸며놓고 분수대 올려놓으면 잘해 놨다,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근데 이 특별한 공공 공간을 특정 시기의 시장이 조잡하고 지저분하게 해놔도 되는가. 이런 걸 얘기하고 싶은 거죠.

△정윤수 평론가의 칼럼을 보면 ‘광장’에 대한 언급이 많다. 석사 학위도 광화문광장에 대한 논문으로 취득한 것으로 아는데. 정 평론가에게 광장이란 무엇인가?
  광장은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물리적인 조건은 무의미한 것 같아요. 광장의 진짜 의미는 도심지 한복판의 일정규모와 면적을 가지고 있는 공공 스페이스에요. 그리고 가급적 비워져있어야 하죠. 사람들의 삶이 그 조형물이 돼야 해요. 산책도 하고, 공연도 하고. 내가 찬성하는 집회가 있으면 참여하고, 반대하는 집회가 있으면 그냥 집에 가고. 이 공공 면적은 지구가 멸망할 때까지 후손들이 계속 사용하는 것인데, 여기다 특정한 조형물을 두면 없애기 어렵잖아요. 지금은 좋은 것 같아도 22세기에는 비워야 할 수도 있고, 23세기에는 또 다른 게 필요할지도 모르고. 또 조형물이 있으면 단순한 테마파크가 돼버려요. 이러면 공공성도 상실되고 광장의 기능도 상실되죠.

 올해의 경우는 특히 그랬어요. 칼럼에서도 언급했듯이 월드컵 때문에 채워야하지만, 세월호 때문에 비워야 하는 상황. 응원을 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었어요. 단지 응원을 하더라도 잊지는 말자, 요란하게 하지는 말자는 거였죠. 국가에 의해 국가적 재난이 발생했는데 애국을 외칠 수 있느냐, ‘대~한민국’을 외칠 수 있느냐는, 이런 언밸런스. 채워야 하는 이유와 비워야 하는 이유가 상충하면 비워야 한다는 거예요.

△여론은 언론을 따라간다고 생각한다. 정윤수 평론가 역시 이런 광장의 모습을 비추는 언론의 프레임에 대해 비판을 가하기도 했는데. 정기적으로 칼럼을 기고하는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대한민국 언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듣고 싶다
우리나라 언론은 모두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거의 파멸 직전에 와있다고 생각해요. 김훈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진보냐 보수냐를 떠나서 사실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고 있죠. 물론 사실에 주관이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지만, 이를 떠나 기본적인 사실조차 제대로 얘기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에요. 예를 들어 MBC에서 나온 세월호 불법농성 보도. 사실 집회는 허가 대상이 아니라 집회 대상이거든요. 근데 해당 기자는 분명하게 ‘허가받지 않’았다고 리포트했어요. 기본적인 사실도 모르고 보도한 거죠.

그 다음이 정파적인 수준을 넘어서버렸다는 사실. 진보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자사이기주의 정파가 돼버렸어요. 특정 정치 진영에 이롭게 보도하는 게 아니라 자기 신문사에 이롭게 하는 거죠. 안보상업주의라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사실 여부가 어찌됐든, 정파 관계가 어찌됐든 자사 상업주의를 기본적으로 깔고 그 위에 정파주의를 얹어서, 사실과 의견이 뒤죽박죽되는 언론으로 가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저를 포함한 많은 칼럼니스트들의 글이, 타성에 젖은 질타가 대부분이라는 거예요. 아주 싱거운 비판, 모호한 비판 대상, 나이브한 문장. 이런 파파라치 수준의 평론가들이 너무나 많아요.

△안타까운 현실이다. 올해는 유독 사건사고가 많아 그런 모습이 부각된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이를 해결해나가야 하는 지금이 굉장히 중요한 시점이라 생각되는데. 정윤수 평론가가 현재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비평한다면?
저로서는 대답하기 너무나 힘드네요. 김훈 선생이었으면 ‘난 몰라, 묻지마’ 했을 텐데 제가 그런 스타일도 아니고. 하하. 제가 보는 관점, 위치, 수준에서 말을 하자면, 국가에 대해 정확히 이해할 계기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국가는 무소불위의 최고 권력기구잖아요. 학계에서는 앞으로 국가가 축소될 것이라고 얘기하지만, 세계적으로 신국가주의가 팽배해지고 있고, 여차하면 국가주의를 앞세워 사회를 단속해버리는 경우도 잦아지고 있어요. 결국 국가와 시민사회, 국가와 개인 일상이 굉장히 팽팽한 긴장으로 훨씬 많은 충돌이 벌어질 것 같아요.

국가라는 하나의 인격체가 있다면 완전히 이기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 삥을 뜯는. 국민생활유지가 아니라 국가유지를 위한. 이런 국가와 우리 삶이 완전히 분리되는 현상이 특히 올해 많이 나타났죠. 작게는 담배 값 인상부터 크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교통사고 가지고 왜 이러냐는 식의 얘기를 하잖아요? 뭐 일반적으로 교통사고나면 ‘그냥 그래’하고 끝이 아니잖아요. 교통경찰은 어디 있었는지, 후송을 제대로 했는지, 긴급조치를 취했는지, 이후 예방장치까지 했는지. 이 모든 걸 하라고 세금 줘서 국가가 있는 건데, 멀쩡한 국회의원들이 교통사고 아니냐고 말하면 말이 안 되잖아요?

국가와 시민사회가 이런 이상한 형태로 분리된다면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는 정글의 게임이 벌어지기가 쉬워요. 원래는 국가가 관리 내지는 심판을 해야 하는데, 국가가 도덕적 우위나 재원이 없으니 개입하지 않는. 그래서 일상생활이 완전히 만인 대 만인의 투쟁처럼 가는 양상이 더 심화될 거라고 보고 있어요. 지금처럼 대통령이 국가이기주의적인 발언을 일삼으며 사회를 내버리면 이 사회는 정글로 간다, 이렇게 생각해요.

이광영 기자  code0maize@pusa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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