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글을 부탁받고 많은 고민을 했다. 필자의 생각을 한정된 분량 속에 녹여내어 쓰려니 막막함이 앞섰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다가 순간 피식, 하고 웃었다. 초등학교 때 백일장을 한다고 하면 원고지 5장을 다 채우지 못해서 쩔쩔매고는 했었는데, 지금은 글자 몇 자 더 안다고 오히려 분량의 부족함을 느낀다니.

그런 와중에 연인은 필자에게 평소 공부했던 내용을 알기 쉽게 적어보는 것은 어떻겠냐고 했다. 물론 그렇게 한다면 좋은 글이 될 것이고 쓰자고 한다면 못 쓸 것 같지도 않았다. 다만 망설여지는 것은‘ 과연 필자가 그런 글을 쓸 그릇이 되느냐’하는 점이었다. 한 철학자의 사상을 짧은 글에 응축해내기에는 아직 내 배움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좀 더 변명하자면 우리 사회에서는 ‘철학’이라는 말이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회사는 고객만족을 경영 철학으로’라거나 ‘제 인생철학은’이라는 말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런 말들 속에서‘ 철학’은 일종의 슬로건이나 좌우명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듯하다. 짧은 한두마디의 글을 통하여 특정한 지향점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다. 하지만 학문으로서의 ‘철학’이란 좀 다른 의미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철학이라는 학문 내에서도 역시 특정한 지향점을 말하기는 한다. 다만 그 지향점이 얼마나 타당한지에 대해서 검토되어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런 지향점이 정당한가에 대하여 적당한 근거와 논리를 통하여 설득력을 얻어야 한다. 그래서 한 철학자의 사상을 짧은 글에 담아내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짧은 슬로건을 통하여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 것은 쉬울 수 있으나, 그의 사상이 얼마나 정당한지에 대해서는 좀 더 많은 말이 필요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정약용이라는 철학자는 ‘실학의 집대성자’라는 짧은 슬로건으로 정의되고는 한다. 이런 정의를 통해 대중에게 정약용이라는 철학자에 대해 알리고,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문적 논의의 영역에서는 상황이 복잡해진다. ‘실학’이라는 학문의 실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적 정의에서부터 ‘집대성’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체계적 이해가 검증되어야 한다. 여기에 ‘이런 정약용의 사상이 현재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는 문제까지 더해진다면…

아마도 이러한 차이점이 대중이 원하는 ‘철학’과 전공자들이 연구하는 ‘철학’ 사이의 괴리이지 않을까 싶다. 대중은 철학에 대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주고 현재 자신의 삶을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주기를 바라는 듯하다. 하지만 전공자들은 ‘쉬운 이해’보다는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며, 한 개인에게 유효한 의미보다는 우리 사회 전체에 유효한 의미를 추구한다. 이러한 두 입장은 동전의 양면일 수는 있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일 것이다.

어쩌면 이 차이가 흔히 말하는 ‘철학의 위기’의 원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서로의 입장이 다르니 대중은 철학을 어렵게 생각하여 기피하게 되고 전공자들은 철학을 쉽게 설명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아닐까? 행여나 조금이라도 철학에 관심이 있고 철학책을 읽고자 하는 분들은 이 점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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