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이맘때 부산영화제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족구왕>을 입에 올렸다. 객석이 완전 뒤집어졌다며. 하지만 나는 그 입소문을 간단히 무시했다. <족구왕>이라는 제목도 썩 끌리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족구’라니 21세기 모던시네마 애호가들의 시선을 모으기는 애초부터 글러먹은 소재가 아닌가. 만약 영화제 상영작에 대한 관객호응도 조사에 소음측정기를 도입한다면, 휘파람과 박장대소로 떠들썩했던 그날 그 영화에 '관객상'이 주어졌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시네필의 게토인 영화제와 현실의 영화시장 간에는 명백한 온도차가 존재한다. 최근 이 영화는 작게 개봉하여 극소수의 팬들에게 환호받은 뒤 조용히 사라졌다. 올 여름시즌 <군도>, <명량>, <해적>이 차례로 스크린을 장악하며 3천만 명이 넘는 관객을 불러들이는 동안 <족구왕>은 간신히 3만 명을 기록했다. 주류영화의 0.1%도 안되는 이 스코어는 그럼에도 한국 저예산독립영화로서는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이다.   
  뒤늦게 보게 된 <족구왕>은 그저 웃기는 영화만은 아니었다. 평범한 복학생이 족구에 대한 열정 하나로 대학 캠퍼스의 히어로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오늘날 ‘판타지’에 가깝다. 장르로 따지자면 스포츠영화와 청춘영화가 결합된 휴먼 코미디이지만, 정서적으로 슈퍼히어로 판타지영화로 보이는 까닭은 이 영화가 2014년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히어로는 여러 모로 대한민국 평균으로, 어딜 가나 마주칠 법한 인물이다. 그런데 우문기 감독은 이런 내 생각에 재를 뿌린다. 그의 말을 빌자면 “홍만섭은 지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대학생”이란다.
  그러고 보니 그렇다. ‘족구에 몰두하는 복학생’은 오늘날 ‘자포자기한 루저’를 의미한다. 사실 이 종족은 한국의 캠퍼스에서 멸종된지 오래되었다. 홍만섭은 그런 의미에서 희귀종이다. 그런데 왜 하필 족구인가? 주변의 경멸섞인 질문에 만섭은 “재밌으니까요”라는 다소 맥 빠지는 답변을 내놓는다. 하긴 족구가 언제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적이 있었던가. 제 아무리 잘해도 국가대표로 발탁될 가능성 제로에다가, 폼 안나고, 인기도 없는, 스포츠라 부르기 망설여지는 그런 스포츠. 바로 그런 이유로 감독은 족구를 선택했다(아무리 생각해도 족구에 버금가는 무용한 짓을 못찾겠다. 그러니 우문기 감독의 족구의 발견은 신의 한수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남들이 피땀 흘려 스펙을 쌓는 동안 ‘순수한 즐거움’을 추구해간 이 인물은 그 댓가를 치를 것인가? 다행히도, 영화는 그 전에 끝난다.
  예상대로 감독에게서 걸작의 반열을 흘낏거리는 야심 따위는 찾을 수 없다. 영화는 캐릭터를 닮아 허풍이 심하고 대책 없이 낭만적이고 한치 구김 없이 명랑쾌활하다. 하지만 이 ‘오락’영화는 의외로 긴 반향을 남긴다. 이를테면 만섭이 성취한 족구왕이라는 이력은 이력서에 써넣을 수 없는 잉여의 취미에 불과하지만, 실은 그것이 하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의미심장해졌다. 대학생들의 스펙전쟁을 다룬 어느 신문기사에서 괄목할만한 이력을 만들려면 철인삼종경기나 자전거 미대륙 횡단, 오지탐험쯤은 해야 한다는 인터뷰를 읽은 적 있다. 그게 동시대상이라면, 만섭의 하찮은 취미는 그 학생들의 ‘대단한 기획력’에 반하는 일종의 혁명 같은 행위가 아닌가.
  언제부턴가 이십대들이 취업에 도움 되지 않는 모든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것은 사실 그들 탓이 아니다. 지금 이십대들이 그리된 것은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들이 이 사회를 포식자의 정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낭만 찾다가는 잡아먹히기 십상인 그런 곳으로. 하지만 나는 그 책임을 어떻게 져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다소 무책임하지만 이 영화에 기대어 ‘쓸데없는 즐거움도 좀 추구하면서 사는 게 청춘’이라고 부추기고 싶은 것이다. 그래도 ‘아프니까 청춘이다’는 말보다는 덜 무책임하다고 믿으면서. 어쩌면 우리는 스펙에 하등 도움 되지 않는, 무용하기 짝이 없는 일을 시도하는 게 가장 급진적인 행위가 돼버린 이상한 시대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