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지 말아야 할 선이란 게 있다. 예컨대 부부싸움을 하면서 귀중한 물건을 집어던질 순 있어도 배우자 집안을 욕하는 건 금물이다. 자칫 두 사람의 다툼이 집안싸움으로 확대될 수 있다.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선도 있다. 데드라인, 소위 마지노선이다. 협상이란 이 양 극단의 선을 설정하고, 그 사이에 놓인 선을 자기에게 유리하게끔 밀고 당기는 줄다리기라 할 수 있다. 비단 협상 현장이 아니더라도 일반 시민들은 ‘무한 자유’와 ‘양심의 가책’이라는 경계선 내에서 살고 있다.
경기의 승패가 전쟁으로 귀결되기도 하는 축구경기에서 선수들 간 각축은 마치 전투와 같다. 지난 브라질 월드컵에서 수아레스는 ‘핵 이빨’로 전투기술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줬다. 그나마 이 사건은 조별 예선에서 벌어진 일이라 우루과이가 16강에 안착하는 데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2006년 독일 월드컵 결승전에서 지단의 박치기가 등장했고, 이로 말미암아 우승컵의 향배마저 바뀌었다. 이탈리아 수비수 마테라치가 자꾸 지단의 유니폼을 잡아끌어서 “내 유니폼이 필요하면 경기 끝나고 줄게”라고 지단이 응수했는데, 마테라치가 “난 창녀 같은 네 여동생이 더 좋아”라고 도발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지단에게 동정심도 들지만 그의 행동이 어리석었음은 명명백백하다. 지난 4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35라운드에서 FC바르셀로나의 알베스가 코너킥을 차기 위해 구석으로 걸어가는 순간 비야레알 관중이 바나나를 던졌다. 유색인종 선수를 ‘원숭이’로 비하하는 인종차별 표시였다. 알베스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바나나를 먹어치웠다. 1-2로 지고 있던 경기도 3-2로 뒤집었다. 비야레알은 경기에서도 매너에서도 졌다. 경기 후 많은 축구선수들이 “우리는 평등하다”란 글을 남기며, 바나나를 먹거나 들고 있는 사진을 SNS에 올렸다. 심지어 핵 이빨 수아레스도 동참했었다.
물리화학 용어에 임계점이라고 있다. 물은 섭씨 0도와 100도 사이에서 액체다. 그렇지만 0℃ 이하에서는 고체, 100℃ 이상에서는 기체로 변한다. 0℃와 100℃가 물의 임계점이다. 갑작스럽게 사물의 성질이 변하기보단 살얼음이나 기포처럼 징후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 세상에서도 넘지 말아야할 선을 넘거나 마지노선이 무너지면 이판사판, “너 죽고 나 죽자”로 돌변한다. 자살, 탈선, 시위, 폭동, 혁명, 전쟁에도 늘 징조가 있기 마련이다. 세상에 갈등 없기를 바라는 것은 유아기적 발상이다. 우리 인생은 갈등과 더불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다. 갈등은 개인과 사회를 진일보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도 하다.
정치란 좁은 의미에서 사회 갈등을 해소하는 예술이다. 이런 멋진 일을 우리 대신 하라고, 비싼 세금을 들여 각종 의원들을 부리고 있다. 그런데 지금 국회의원들이 제대로 일을 않고 있다. 오죽하면 추석 민심 탐방의 결론도 ‘국회 해산’이었겠나? 세월호 특별법 처리를 놓고 급기야 일부 시민들은 단식이라는 극단적 수단을 택했다. 단언컨대 국회의원들은 제 밥그릇을 걷어차지 않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수사권’과 ‘기소권’을 구실로 시간 낭비만 했으면서, 추석 상여금은 두둑하게 챙겼다. 한 술 더 떠 대의 민주주의와 그 제도를 흔들지 말라고 한다.
세월호 특별법은 의회 민주주의가 아닌 ‘삼권 분립’의 문제라고 대통령은 답했다. 원론적으로 옳다. 그렇지만 경찰(수사권)과 검찰(수사권, 기소권) 모두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제왕적 대통령’이 끝내 책임은 지지 않겠다고 한다. 알지만 행하지는 않겠다는 뜻이다. 이 지경이고 보니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 국민의 종복이 맞는지조차 헷갈린다.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이 이래저래 사문화되었다. 단식 현장에서 버젓이 ‘폭식 집회’를 연 버러지 같은 국민도 있고 보면 주인 행세도 쉽지 않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이 임계점에 임박했음을 누군들 알아주랴? 청명한 하늘처럼 가슴 시린 가을이다. 
 

저작권자 © 채널PNU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