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 대한 관심은 지나친 중앙집권과 수도권 비대화 등이 가져온 현실적인 문제를 극복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던 1980년대를 전후로 증폭되었다. 부산지역도 예외는 아니어서 1980년대 후반부터 시민들의 일상적 삶의 공간인 지역사회의 다양한 연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곧 당시 국가나 서울중심의 연구에 집중되었던 한국사회의 학문풍토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젊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지역에 대한 인식 전환의 시작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사회과학계에 제기되어왔던 지역 간 격차 해소를 위한 보다 본격화된 논의로 지역균형발전과 지방분권, 지역의 내적 발전 등의 사회적 요구에 부응한 학계의 대응이기도 했다.

 

지역학 연구의 흐름

지역학 연구의 흐름은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의 흐름은 앞서 잠시 언급했던 1980년대 후반 이후 지역의 연구자들이 당시 지역 사회가 직면한 많은 문제의 주요 원인으로 한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야기된 지역 불균등의 심화를 주목하면서 시작된다. 인문사회과학자들이 중심이 된 지역 사회연구회가 대구를 시작으로 부산, 전주, 광주 등에서 속속 결성되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지역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 당면한 문제의 해결 방안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1988년‘ 지역사회연구회’의 결성은 연구자들이 자신들의 전공 분야의 한계를 넘어서 지역을 종합적으로 인식하고 연구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천명했다. 이 연구회를 통해 각 분과학문 전공자들의 상호토론과 비판이 활성화되었다. 연구자들은 전공과 관심은 달랐지만 지역사회의 문제를 한국 자본주의 발전과정의 모순으로 인식한다는 점과 학제적 연구를 추구하고자 한 공통점이 있었다. 1990년대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지역에서는 고유한 지역의 정체성 확립과 발전 가능성 탐색 노력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조건 속에서 중

앙-중심성에 대한 반성과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지역사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면서,‘ 지역학’에 대한 문제의식이 구체적으 로 드러나기 시작하였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하나의 흐름은 폭넓은 개념으로 주로 세계적 수준에서 타자의 삶을 연구한 지역 연구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지역학이다. 지역학은 지역의 특수성을 이해하고 규명하고자 하여 상대주의적 관점이 내포된 민속지적 연구흐름과 맥을 같이 한다. 1990년대 세계화 담론의 영향 아래 지역연구가 대학을 중심으로 국제관계 및 세계의 각 지역을 연구하는 연구소와 학과가 개설되는 등 빠르게 제도화되면서 지역학의 개념과 연구대상, 방법론에 대한 종합과 학문적 체계화가 시도되어 왔다. 이러한 흐름은 냉전시대 미국의 세계지배 전략에서 시작되어 초기 비 서구지역에 대한 지식 축적과 근대화 론에 경도된 연구행태에 대한 반성을 거쳐 문화연구와 접목된다. 이후 지역연구는 문화 상대주의적 시각에서 지역의 특수성과 보편성의 규명이라는 나름의 학문적 위상을 갖추어 나갔다. 필연적으로 학제적 성격을 띠는 문화연구는 방법적 측면과 연구대상의 상대적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지역학과 상당 부분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지역 연구에 문화연구의 영향력이 증가하면서 지역연구의 질적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주로 역사학과 경제학, 행정학, 사회학 등의 분과학문의 한계를 넘어선 학제적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부산학, 부산 발견의 원동력

부산학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DNA를 발견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다. 부산은 개항, 일제강점기, 해방, 한국전쟁, 산업화 등 한국사회 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역사적 경험과 기억이 혼재된 근대도시이다. 부산학은 부산의 관점에서 현실을 파악하거나 진단하고, 정체성을 통한 현재와 미래의 과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지난 십여 년간 이루어진 부산학 연구들 역시 이러한 목표를 기저에 둔 것이 대부분이다. 귀납적으로 드러나는 부산학의 특징은 △과거의 전통이나 고유성에 대한 연구보다는 현재의 문화, 특히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주목한 연구들이 많다는 점 △부산 내부의 이질적 시간과 공간, 문화에 대한 실증.현장 연구를 통해 내적인 통합과정을 살펴보려는 연구들이 이루어진다는 점 △보다 직접적으로 미래의 모습을 그려내거나 실천적 방향을 제시하고자 하는 연구가 많다는 점 △이러한 연구들을 대중적인 수준에서 기술하며 지역사회와 소통하고자 한다는 점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지역학의 유형을 △ 지역 역사, 문화, 민속 등의 연구를 통해 지역 아이덴티티의 확립을 시도하여 지역을 재발견하고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는데 중점을 둔 <연구체계형> △행정이나 대학, NPO 등에 의해 지역주민의 평생학습사업의 하나로 행해지는 <평생학습형> △직면한 과제 해결에 중점을 두는 <해결과제형>으로 분류하고 있다.

이는 부산학이 현재 놓여 있는 과제와 일맥상통한다. 먼저 부산의 정체성은 개인과 집단의 다중적 정체성이라는 점이다. 사회와 자연환경·공간의 영향을 받고, ‘지금 여기’에 결합된‘ 현재 시점’에 기준을 두고 과거로부터 이어져 재구성되며, 타자·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매번 새롭게 수행되는 복잡한 과정의 산물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지역학의 역사적 전개과정에 대한 비판적 반성 속에서 일상생활과 그 공간에 주목해야 한다는 해리 하르투니언의 논의는 많은 시사점을 준다. 그는 현재의 지역학이 토착지식과 내부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현재 의 고유성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그 사회가 역사적으로 접촉한 근대성. 외부와의 관계로 인해 일으키게 된 변형을 놓치게 된 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상생활은 새로운 현재와 과거를 매개하면서 동질화를 요구하는 근대화를 중재하고, 일상의 공간은 특정 장소에 뿌리를 내리고 있되 더 넓은 시공간적 맥락에 연결되어 드러나지 않은 수많은 관계와 가능성을 포함하기에 이 두 가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역사의 요동>, 2006). 일상생활에 주목한다면, 지역민의 삶 을 관통하는 일상생활과 연관된 의식주, 삶의 공간인 주택, 여가와 문화 등 다양한 탐구의 영역 확장이 가능해진다.

다음으로 학문체계나 연구의 틀을 넘어 시민과 소통하는 부산학으로 발전해 가야 한다. 연구자와 시민(정책)사회와의 연결 통로인 문화공간과 인문학 강좌 등을 통해 공유되어야 한다. 학문적 체계나 상아탑의 울타리 안에 머무른다면 지역연구의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전달하고, 지역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여주기 위한 평생학습의 토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부산 발전과 결합되어야 한다. 한 사례로 부산학연구의 성과물인 ‘부산의 산동네(2008)’는 도시재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한‘ 산복도로 르네상스’ 프로젝트로 연결되어 서민주거 재생 정책으로 실행되었다. 이처럼 지방자치제의 안정화와 도시간 경쟁의 심화 등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부산의 자립과 생존전략을 풀어나갈 열쇠로서 부산학에 거는 기대와 발전전망은 희망적이다.

 

도플갱어, 도시 살아남기

부산학은 지역정체성의 확립, 지역발전의 토대구축을 위한 실천의 과정이다. 지방정부차원에서 부산학은 급변하는 정치경제 환경 속에서 부산시 정책 수립의 기초이자 토대로서 기능해 줄 중요한 보고(寶庫)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나아가 시민들은 지역사회 와 문화를 이해하고, 지역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는 부산학의 결과물들을 기대하고 있 다. 이런 의미에서 부산학은 부산의 존재와 지속성, 그리고 더 나아가 미래전망의 단초를 제공해 줄 것이다.

   

 ▲부산발전연구원 오재환 연구위원

서양의 옛 이야기‘ 도플갱어’를 아는가. 자신과 외양과 행동과 생각이 모두 같은 존재인 도플갱어를 동시에 같은 공간에서 만나게 되면 반드시 둘 중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는 이야기다. 같은 시공간에서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이가 함께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비슷한 경제활동과 문화적 환경으로 닮아가는 시대에 고유성과 정체성에 목말라하는 이유는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통로이기에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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