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에서‘ 법’과‘ 시민’, 과연 누가 위인가? 건전한 시민이라면 당연히 시민이라고 답할 것이다. 원칙적으로 시민은 법을 만드는 주체이고, 법은 갈등을 조정하기 위한 시민들의 합의라는 것쯤은 상식이니까. 하지만 일상에선 이 관계가 흔히 전도된다. 보통 시민들은 법의 지배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보통시민들이 이런 일상을 깨고 입법요구를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세월호 특별법에 대한 요구처럼 기존의 법이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경우이다.

  이때 권력이 시민들의 입법요구를 묵살하며 기존의 법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면 이런 사회는 이미 건강한 민주사회가 아니다. 이미 그 사회의 권력이 시민의 편을 떠나 법을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을 보장하는 통치수단으로 가져가 버렸다는 표시이다. 권력이 시민들의 당연한 권리 요구를 거부하고 얼마나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 하는지는 역사에서 보면 더욱 잘 드러난다.‘ 시민들이 재산과 권리를 공유한다’는 공화정의 이상을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로마에서도 공화정의 몰락을 자초한 것은 권력의 탐욕과 독선이었다.

  기원전 2세기 중반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바다 건너 정복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듭하여 지중해 연안에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로마 정부는 정복한 토지의 일부를 시민들에게 매각하고, 일부는 공유지로 만들어 임대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런데 실제로 토지의 대부분은 로마의 고위 관리와 원로원 의원 등 유력자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토지를 차지한 로마의 부자들은 전쟁에서 잡아온 다른 민족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전쟁 전엔 꿈도 꿀 수 없었을 정도의 커다란 농장을 만들었다. 농장과 부의 규모는 가히 우리 사회의 재벌에 견줄 만 했고, 부자들은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팔아 챙기는 수입으로 온갖 사치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정복전쟁에 징집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던 병사들의 운명은 달랐다. 영토 정복으로 로마 전체의 부가 확대되었지만 이들에게는 돌아온 이득은 없었다. 사실 로마 병사들의 대부분은 전쟁 전 작은자기 땅을 가지고 가족과 함께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리던 자영농들이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돌아간 고향에는 이들이 농사지을 농토가 없었다. 전쟁 때 전국이 전쟁터가 되는 바람에 농토가 완전히 황폐화된 경우도 있었고, 가장이 농사를 돌보지 못하는 동안 땅은 이미 남의 손에 넘어간 경우도 있었다. 부자들이 점유한 토지는 갈수록 커졌고, 토지에서 밀려나 난 농민들은 빈털터리가 되어 대도시로 몰려들었다.

  로마는 사회의 양극화, 중산층의 몰락, 시민 병의 약화라는 총체적 위기를 맞았다. 기원전 135년 호민관이었던 티베리우스 그락쿠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새로운 입법안을 마련했다. 그가 마련한 농지 개혁법의 골자는 한 사람이 소유할 수 있는 토지의 상한선을 정하고 부자들이 그 이상으로 가지고 있는 토지를 몰수해서 토지를 잃은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자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대농장 규제와 농지 재분배를 통한 일자리 나누기였다. 이 법안이 발표되자 많은 시민들이 반겼지만 광대한 토지를 점유하고 있던 많은 원로원 의원들은 심하게 반발했다‘. 재산권 침해의 선례가 될 수 있다’, ‘로마의 근간을 뒤흔들 수 있는 말도 안 되는 법안이다’, ‘티베리우스가 이 법안으로 시민을 선동하여 자신의 정치적 야욕을 챙기려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티베리우스는 결국 보수파 의원들에 의해 살해당해 추종자 3백여 명의 사체와 함께 근처 티베르강에 버려졌다.  

이후 로마 사회의 양극화는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이어지며 기원전 509년 이래 로마가 지켜왔던 공화정 체제는 몰락의 길로 치달았다. 지금 돌이켜봐도 티베리우스의 개혁안은 당시 로마 사회의 문제를 가장 잘 해결할 수 있는 시민들의 합리적인 요구였다.이를 힘으로 막고 로마의 특권층이 지켜낸 건 자신들의 재산과 권력이었다. 한 사회의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들의 탐욕과 독선이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적 이상을 짓밟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보여주는 섬뜩한 역사의 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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